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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장그래'는 가라... 반항적 '김과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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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장그래'는 가라... 반항적 '김과장'이 왔다

입력
2017.03.2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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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김과장'의 김성룡(남궁민)은 회사의 '을'을 대신해 '갑'에게 시원한 일침을 날려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3HW COM 제공
KBS2 '김과장'의 김성룡(남궁민)은 회사의 '을'을 대신해 '갑'에게 시원한 일침을 날려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3HW COM 제공

“오늘 다과에 엿이 있네요. 이사님 엿 먹어!”

요즘 직장 내 ‘을’들의 속풀이 드라마로 환대 받고 있는 KBS2 수목드라마의 ‘김과장’에 등장한 대사다. ‘직원 착취’에 여념이 없는 경영진이라면 뜨끔하고, 직장 내 불이익을 하소연할 곳 없는 을들이라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대목이다.

이 시대 수많은 을들이 속으로 삭였을 말들이 김 과장(남궁민)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김 과장은 처음엔 갑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군다 싶더니, 본의 아니게 사람을 구한 뒤부터는 의인으로 거듭나 ‘을들의 대장’이 됐다.

“말 안되면 어때”… ‘리얼리티+판타지’ 복합 전략

방송 전 ‘김과장’은 기대작이 아니었다. 이영애가 13년 만에 복귀한다 하여 화제를 모은 SBS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와 같은 시간대 편성되면서 제작진은 일찌감치 시청률 1위 욕심을 비웠다. 그런데 방영 4회 만에 시청률 13.8%로 ‘사임당’(12.3%)을 제치더니, 2회를 남겨두고 있는 지금까지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김과장’의 인기몰이는 최근 정국과 세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갑을 응징하는 을의 반격, 통쾌한 ‘사이다 전개’가 ‘국정농단 사태’로 무력감에 빠진 시청자의 속을 뚫어줬다는 평가다. 드라마에는 국정 농단 사태를 반영한 듯 현실과 겹치는 설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TQ그룹의 실세 ‘도어락 3인방’은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을 연상케 한다. 회계감사 출신 재무이사 서율(준호)의 경우 ‘김과장’의 이재훈 PD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흙수저’ 논란 등 지난해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들로 ‘집단 우울증’에 빠진 대중에게 해학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통쾌함을 선사하려 한 전략은 시청률 고공비행으로 이어졌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몇 차례 권력의 힘, 갑의 횡포에 분노한 국민이 실제로 이룰 수 없는 반격의 욕구를 드라마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언제까지 당할 쏘냐”… 을들의 반격

‘김과장’은 직장을 배경으로 한 일명 ‘오피스 드라마’의 변모를 나타내기도 한다. 국내 오피스 드라마는 주로 조직의 생리와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애환에 초점을 맞춰왔다. 2000년대 초반에는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성공하는 ‘신데렐라형’ 캐릭터가 많았고 이후 실패의 좌절을 겪는 사실적인 캐릭터가 공감을 샀다.

KBS2 ‘광고천재 이태백’(2013)의 이태백(진구)은 꿈과 희망이 있는 청년이다. 고졸 학력의 흙수저 이태백은 서울에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광고인으로 거듭난다. KBS2 ‘직장의 신’(2013)의 계약직 정주리(정유미)도 외로워도 슬퍼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긍정적인 직장인의 면모를 보였다.

tvN ‘미생’에는 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장그래(임시완)는 4명의 동기 중 유일하게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는 영어를 잘 못해 외국인 전화 응대를 하지 못하고 복사기 사용법을 몰라 쩔쩔매기도 한다. 부족한 자신을 질책하며 정규직 전환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계약 만료로 회사를 떠난다.

하지만 ‘김과장’은 다르다. 상사에게 쉬 대들지 못하거나, 가혹한 현실을 쉬 받아들이던 이전 ‘직장 캐릭터’들과 결을 달리 한다. 판타지라 불러도 될 만큼 직장 내 갑을 향한 을의 화끈한 반격을 보여준다.

원래 극본에서 김 과장은 원칙주의자였다. 자존심이 강하고 꼼꼼한 성격의 회계사로 TQ그룹 내 약자의 편에서 상식을 지키려 노력하는, 다소 진지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지난해 말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 논의 끝에 김과장은 조직폭력배의 부정회계를 돕던 사기꾼으로 바뀌었다. 짓궂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 부각되며 좀 더 입체적인 인물로 변신했다.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시청자들은 발을 헛디뎌 사람을 구하고, 해고되기 위해 회사 회장 아들의 팔을 꺾는 ‘슈퍼 을’의 활약상을 못 볼 수도 있었다. 1월 열린 ‘김과장’ 제작발표회에서 이재훈 PD은 “나라의 주인이 대통령이 아니듯, 기업 회장이 회사의 주인은 아니라는 점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판타지에만 기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지는 않았다. 다른 부서 뒤치다꺼리에 여념이 없는 경리부의 비애, 어린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경리부 부장 추남호(김원해)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무실 풍경이다. ‘김과장’의 김성근 책임프로듀서(CP)는 “직장인의 애환 등 기본적인 구조는 사실감을 살리되,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인물로 환상을 심었다”고 밝혔다.

tvN '미생'은 정규직이 되지 못한 비정규직 장그래의 사연을 담으며 비정한 회사생활의 면모를 사실감 있게 전했다. tvN 방송화면 캡처
tvN '미생'은 정규직이 되지 못한 비정규직 장그래의 사연을 담으며 비정한 회사생활의 면모를 사실감 있게 전했다. tvN 방송화면 캡처

개인보다 집단에 집중… 새로운 유형의 ‘히어로물’

을의 반란은 ‘김과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갑에 당당히 맞서는 ‘슈퍼 을’ 캐릭터가 새로운 대세로 떠오를 조짐이다. 15일 첫 전파를 탄 MBC ‘자체발광 오피스’의 흙수저 은호원(고아성)도 ‘슈퍼 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은호원은 “회사에 인생을 걸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하는 면접관에게 “아저씨들은 회사에 인생을 걸고 다녀요?”라며 시원한 일침을 날린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 생각하는 은호원은 거침 없이 생각을 표현한다.

‘김과장’ 속 김 과장처럼 ‘슈퍼 을’이 대중의 환호를 받는 이유는 ‘해도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해서라는 분석이 따른다. 2000년대 이전에는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2030세대에게 있었으나, 지금 젊은 세대는 수년간 노력해도 안 된다는 집단 무기력증에 빠졌다는 것이다. ‘헬조선’, ‘N포세대’ ‘흙수저’ 등 젊은 세대의 좌절감을 반영한 신조어의 등장과 궤는 같이 한다.

곽금주 교수는 “학벌 등 이른바 좋은 스펙에도 취직이 안 되고 힘들게 대기업에 들어가도 그 안에서 또 ‘미생’인 경우가 많다”며 “이상은 높아져 가는 데 노력해도 안 되니 (꿈을)포기해 버린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현실이 각박해 통렬한 오피스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상황에 대입하고 대리만족하는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과거 오피스 드라마는 개인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집단과 사회적 이슈에 더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라며 “을들을 대신해 갑과 싸우는 이야기 구조로 새로운 유형의 히어로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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