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에는 메시지도,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저 그림일 뿐입니다.”
5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화가 김홍주(70)의 작품 설명은 이게 전부다. 미술작가들이 흔히 “작품 자체로 느껴달라”고 말하지만, 표현하고 싶은 바가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김홍주의 경우는 좀 다르다. 정말로 덧붙일 말이 없다. “평론가들이 내 작품을 좋아하질 않아요. 설명을 해야 하는데 설명할 거리가 없으니까.” 작가의 너스레에 맞은편에 있던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가 답했다.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들인 공력과 독특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니 2011년작 ‘무제’를 보자. 가로ㆍ세로 각각 146㎝ 크기의 캔버스에 가득 찬 아크릴 물감은 전체적으로 흰 꽃다발의 형상을 띤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물감의 결을 따라 전문가용 세필(細筆)로 그은 미세한 선이 잔뜩 있다. 세필의 흔적이 모여 그림 전체를 아우르는 김홍주 회화만의 독특한 색감이 나타난다. 유 교수는 “물감 자체의 색이 아니라 붓질을 통해 만들어진 색이기에 인쇄물로는 재현할 수 없고 직접 그림을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홍주의 그림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붓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김홍주는 “세필이 따라가는 물감의 결에 따라 그림의 형태가 저절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전체 모양 정도는 생각하고 그리지만, 세부 모양은 그리면서 결정합니다. 세필을 긋다 보면 벌레들이 꿈틀대는 것 같기도 하고 험준한 산세가 뻗어나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항아리 형상을 한 2014년작 ‘무제’를 가리켜 “항아리 안에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있다”고 말했지만, 이 또한 김홍주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떠올린 감상에 가깝다.
김홍주의 작품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외형상으론 많은 변화를 겪었다. 초창기에는 거울이나 창틀 속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해 극사실주의 화가로 분류됐었고 근래로 올수록 점점 추상도를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세필을 활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는 행위 그 자체’를 강조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김홍주는 “나는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하니까 몸으로 때우는 것”이라 겸손하게 말하지만, 바꿔 말하면 ‘생각의 표현으로서 그림’에 대한 저항이다.
한 작품을 그리는 데 보통 1개월 정도 소요되지만 김홍주는 여전히 조수도 없이 홀로 작업하기를 고수한다. 그의 높은 집중력과 예민한 감각, 세밀한 붓질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홍주는 “요즘 눈이 어둡고 체력도 부족해 작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면서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계속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라 말했다. 2016년 1월 24일까지. (02)735-8449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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