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영부인 기획 어때요. 우리에게는 왜 미셸 오바마 같은 영부인이 없을까. 우리 국민들은 어떤 영부인을 바라는가 알아보는 거요.”
2월 중순 한국일보 기획취재부 기획회의에서 영부인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처리 결론이 나오지 않았지만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때라 시기는 좋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주로 대선 후보에 관심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그 배우자를 주제로 다뤄보자는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허를 찔렀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관건은 기존 영부인 관련 기사나 기획과 차별화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대선이 다가오면 기존 매체는 물론 다달이 나오는 여성지까지 후보 배우자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문조사 아이디어는 그래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영부인 중 가장 좋아하는 영부인, 반대로 싫어하는 영부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울러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때 그 배우자가 누구 인지를 얼마나 비중있게 여기고 있을까. 어떤 영부인 상을 원하는가를 물어보는 시도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미 국민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린 미셸 오바마 얘기를 다뤄보기로 했습니다. 롤 모델로 삼아 보자는 뜻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부인이 이렇듯 대중의 관심을 받는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획 기사에 이어 주요 대선 후보 배우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섭외가 가장 큰 숙제이자 승부처였습니다. 다른 기사는 기자들이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만 인터뷰 섭외는 열심히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대상 선정부터 단순치 않았습니다. 주요 여론조사 지지율을 기준으로 한다면 야권 후보들만 대상이 될 게 뻔했습니다. 여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보수 진영 후보를 섭외하려 했지만 그 중 지지율 선두인 황교안 국무총리는 출마를 결정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섭외 대상으로 삼았던 또 다른 보수 후보도 고사했습니다. 결국 야권 후보들만 남았고, 안희정 충남지사의 부인 민주원 여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의 부인 김혜경 여사부터 일정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그 동안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부인 김미경 교수도 의외로 흔쾌히 응해줬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부인 김정숙 여사섭외가 ‘대박’ 이었습니다.
최근까지 2년 가까이 정치부 기자를 했던 경력과 인맥을 십분 활용했지만, 답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였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기로 했고, 문재인 전 대표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하는데 지금은 아니라니 기다리는 수밖에요. 하기야 만에 하나 ‘탄핵 기각’ 결과가 나오면 인터뷰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선고가 나왔고 그 날 당장 인터뷰 약속을 잡았습니다.
인터뷰 대상 결정과 관련해 또 하나의 숙제는 꼭 그 대상이 영‘부인’이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박 전 대통령에겐 배우자가 없었지만 앞으로 여성 대통령과 영부군이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지지율은 다소 낮았지만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남편 이승배 마을학교 이사장을 인터뷰하기로 한 이유입니다. 이렇게 김정숙 여사를 포함한 5명의 예비 대통령 배우자와 인터뷰 약속을 확정 지은 것은 처음 기획 아이디어가 나온 지 한 달이 훨씬 흐른 뒤였습니다.
인터뷰를 사전 조율하면서 한국일보는 ‘내가 추구하는 영부인의 역할이란 무엇이냐’는 구체적인 주제가 있음을 여러 차례 후보 측에 강조했습니다. 이번 기획 ‘내일의 퍼스트레이디를 묻다’가 이전까지 나왔던 많은 영부인 후보 인터뷰와 차별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후보 캠프에서는 후보가 된 것도 당선이 된 것도 아닌데 ‘영부인이 된다면’ 이라는 질문을 받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강하게 주장하면 너무 나선다, 오버한다는 말이 나올까 싶고, 그렇다고 주저주저하면 영 생각이 없구나 하는 말이 나올까 걱정됐겠죠. 게다가 당내 경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말 한 번 잘못하면 지지율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기자들을 만난 경험이 적어 긴장감이 확연했던 배우자들은 시간 차가 좀 있긴 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에 긴장이 풀리면서 입도 함께 풀렸습니다. 때로는 인터뷰를 맡은 기획취재부 박선영 기자와 수다를 떨 듯, 또 때로는 까칠한 유권자에게 남편의 지지를 호소하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 때문일까요. 남편을 슬쩍 ‘디스’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오프(오프 더 레코드ㆍ기사에 쓰지 않아줬으면 한다는 요구)’를 전제로 상당한 파장이 있을 수 있는 정치적 발언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인터뷰가 그 동안 ‘누구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응어리나 스트레스를 풀어낼 기회가 됐던 걸까요. 좀처럼 흥분하지 않다가 목소리가 확 올라가기도 하고, 좀처럼 비판하지 않다가 서운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하고,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가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실무진이 준비한 예상 답안지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인터뷰 뒤 기자와 인사를 나누며 팔짱을 끼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친근함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번 인터뷰 기획이 기자 입장에서도 기대 이상이었던 것은 혹시 영부인이 된다면 ‘그저 묵묵히 대통령의 옆에 있겠습니다’는 식의 교과서적 답변만 나오면 어쩌나 했던 걱정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는 점이었습니다. ‘내일의 퍼스트레이디’ 후보들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 가정과 가정 아닌 곳에서 해왔던 역할을 계속 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당당히 밝히기도 했으니까요. 오히려 왜 진작 이런 인터뷰를 하지 않았나 잘못했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50일 가까운 준비 기간 뒤 지난 5회에 걸친 기사(본보 3월 20~24일 ‘내일의 퍼스트 레이디를 묻다’)가 나가고 독자들로부터 갖가지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누구의 부인’으로만 알았던 배우자의 다른 면을 보게 됐다는 것부터 이름만 알고 잘 몰랐던 배우자의 모습을 알게 됐다는 것까지. 특히 심상정 대표의 남편 이승배씨 기사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한가지 뜻하지 않은 반응에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편보다 부인이 훨씬 낫다. 후보를 바꾸자’는 반응은 100% 진담은 아니라 해도 쉬쉬해야 했습니다. 속으로야 인터뷰가 매우 잘 된 것이구나 생각했지만요.
5월 9일 대선이 끝나면 한국일보가 인터뷰 한 배우자 5명 중 한 명이 실제 대통령의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누구든 한국일보의 곤란한 질문에 온 마음을 다해 답변을 했던 그 때의 진심을 잊지 않고,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있는 시민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기를 고대합니다. 미 국민들이 미셸 오바마에게 열광했듯 우리도 국민의 사랑을 받을 만한 영부인, 새로운 리더십에 걸맞은 영부인을 보고 싶습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