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능 끝나길 기다렸다
“대통령 퇴진 너무 외치고 싶었죠”
최순실 게이트에 격한 울분 토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날선 비난도
“말타고 대학 간 사람 있지만…”
후배들 각종 풍자로 선배들 응원
2. 보신각 앞서 ‘고3집회’
학생들 채점도 미룬채 속속 집결
“19일 4차 촛불집회 참석 해야죠”
“‘불수능’ 보다 나라가 걱정돼 채점도 않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17일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오후 7시. 수험생 김현아(18)양은 오후 4시30분 서울 강남구 진선여고에서 시험을 마치자마자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종로구 보신각 앞으로 한달음에 왔다. 시험 공부 탓에 꾹꾹 눌러왔던 ‘박근혜는 하야하라!’ 여덟 글자를 힘껏 외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양은 “오늘 시험을 본 고3들은 세월호 참사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최순실ㆍ정유라 사태까지 수많은 부조리를 목도한 세대”라며 “입시 준비를 핑계로 미뤄 온 정권과의 싸움을 제대로 시작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이날 청소년단체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이 주관한 ‘박근혜 하야 고3집회’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모임 사실을 접한 100여명의 수험생이 참석했다. 이들의 얼굴에는 어려운 수능을 치렀다는 고단함보다 답답한 현실을 바꿔보자는 의지가 넘쳐났다. 마이크를 집어 든 서울 예일여고 3학년 남지원(18)양은 “국민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자만했던 정권은 이제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퇴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험생들은 박 대통령이 노력과 정의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크게 분노했다. 김다연(17)양은 “공부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그간 집회 참여를 꺼렸는데 정의와 배려를 져버린 박근혜 정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분개도 터져 나왔다. 이찬진(18)군은 “역사를 좋아해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이제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편향된 교과서로 배우고 수능을 치러야 하는 후배들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자유발언을 마친 참석자들은 보신각을 출발해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까지 1㎞를 걸으며 수능생의 동참을 알렸다.
후배들의 열띤 응원과 학부모들의 간절한 기도가 어우러지기 마련인 수능일 아침 고사장 풍경도 예년과는 확실히 달랐다. 수험생들은 잔뜩 긴장하면서도 최씨 딸 정유라씨의 입시ㆍ학사 특혜 의혹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여고 고사장으로 향하던 강혜인(18)양은 “비선실세라는 사람의 딸을 보면서 수능등급 하나 올리려 밤을 지샜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국정농락 사태를 규탄하는 청소년들의 민심은 응원 구호에서도 느껴졌다. 오전 6시부터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덕수고 앞에 자리잡은 서울 자양고 학생들은 정씨의 입시 부정을 빗대 ‘말 타고 가지 말고 수능 봐서 대학가자’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박 대통령의 발언을 패러디한 ‘우주가 도와줄 거야’라는 메시지로 용기를 북돋웠다. 고2 김교신(17)군은 “현 세태를 꼬집는 풍자로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보는 선배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능을 마친 ‘교복부대’는 19일 열릴 박 대통령 퇴진 4차 촛불집회에 대거 참석해 힘을 보탤 예정이다. 이날 박 대통령의 텃밭인 대구ㆍ경북을 비롯해 전국 100여개 지역에서 촛불집회와 문화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등 최대 150만명이 퇴진운동에 동참할 예정이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사태는 공정성이 생명인 입시 시스템마저 유린됐다는 점에서 수험생들의 분노가 더 컸다”며 “정치적 자각을 한 젊은 민심이 하야의 불길을 타오르게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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