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에 짝퉁이 따르듯 명작에 위작이 붙는다. 빛을 뒤따르는 불행한 그림자다.
프랑스 고전주의 대표 화가 니콜라 푸생(1594~1665)의 드로잉 작품을 두고 18세기 영국 법정에서 위작 공방이 벌어졌다. 1787년 런던 법원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판결의 근거로 삼았다. 동료 예술가, 감정 등 예술계 전문가, 이른바 전문가들의 의견이 ‘결정적’이었다. 경험칙에서 비롯된 ‘카너서십’(connoisserurship)이라 불리는 전문가들의 안목은 예술품의 진위 판단에 있어 철저히 존중됐다.
살아 생전 루브르 컬렉션에 작품을 등록했던 유일한 예술가 발튀스(1908~2001). 미술품 거래상 거트루트 스타인은 발튀스의 아내로부터 1954년작 ‘콜레트의 옆모습’을 진품보증서와 함께 구입했다. 이후 작품은 허스탠드 갤러리에 위탁됐고, 다음 해 파리의 버나드 갤러리에 팔려나갔다. 버나드 갤러리는 당시 81세였던 발튀스에게 구매한 작품의 사진을 보여줬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발튀스가 “이 작품은 가짜”라며 작품 사진 뒷면에 “명백히 가짜(faux manifeste)”라고 휘갈겼던 것이다. 소송은 허스탠드 갤러리와 스타인 간에 벌어졌다. 1심 법원은 갤러리 편이었다. 하지만 뉴욕항소법원은 1995년 정반대의 판결을 내놓았다. 예술가 본인은 가짜라는데 법원은 진짜라고 판결해 버린 것이다.
문제의 작품이 수록된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 도록이 있었다. 발튀스가 이 도록에 실린 자신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편집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 스타인의 반격은 또 있었다. 발튀스에게는 자신과 좋지 않게 헤어진 연인이나 딜러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진품성을 부정한 사례들이 몇몇 있었던 모양이다. 스타인은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자신에게 작품을 판 발튀스의 (작품을 구입할 당시에는 부인이었고 감정할 당시에는 헤어진)부인에 대한 반감으로 진품성을 부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증거들이 발튀스의 입을 압도하고 말았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예술품 진위 논쟁에서 절대적 기준은 작가였다. 다음은 감정과 거래 등 예술 전문가, 동료 예술가들의 권위와 경험이었다. 그 정도 기준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창작만큼 위조 또한 같은 속도로 진화해 나갔다. 작가 절대주의 시대가 사라졌고 작가의 증언은 상대적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오늘날 예술품 진위 재판에서는 예술 전문가의 권위나 평판에 의존하기보다는 작품의 진위를 입증하는데 사용되는 소송 기술이나 근거의 정당성에 훨씬 더 무게를 둔다. 작가 자신이든 전속 아트 딜러의 의견이든 명확한 근거가 함께 제시되지 않으면 다른 증거에 의해 배척될 수 있는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예술법계의 분명한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가의 권위를 법원이 대신하게 되었는가.
키네틱 아트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칼더(1898~1976)의 모빌 작품 ‘리오 네로(Rio Nero)’ 또한 위작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여 년간 칼더의 전속 갤러리스트이자 ‘칼더 전문가’로 활동해 온 클라우스 펄스가 증언에 나섰다. 펄스는 법정 밖에서의 주장 그대로 법정에서도 가짜라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하지만 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펄스가 문제의 작품을 감정할 때 아카이브에 있던 사진과 대조하며 불과 몇 분만에 위작이라고 결론 내렸던 부분을 문제 삼았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여 법원은 펄스의 증언을 버리고 작품 속 서명에 비추어볼 때 칼더의 작품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해온 상대방의 의견을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끝이 났고, 문제의 작품이 법정 밖에서 진품으로 인정 받게 되었을까. 펄스가 끝까지 위작 의견을 굽히지 않자 문제의 작품은 더 이상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았다. 법원의 판결이 소송 당사자들에게까지는 효력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시장마저 강제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안목 감정과 요즘 대세인 과학 감정이 충돌하는 21세기의 사례를 보자. 모든 사건이 꼭 법원으로 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2002년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락(1912~1956)의 작업실이 있던 뉴욕 롱아일랜드의 한 창고에서 폴락의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 32점이 발견되었다. 폴락 부부의 절친한 친구였던 허버트 매터의 유품이었다. 발견된 상자에는 ‘잭슨 폴락 1946-1949 습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미술사가 전공인 앨런 랜도 교수를 중심으로 미술품 복원사, 화학자, 심지어 탄도 물리학자까지 진위 논쟁에 참여했다. 2006년 잭슨 폴락 재단과 폴락의 카탈로그 레조네(전작도록) 공동 저자는 과학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위작임을 선언했다. 기하학적 패턴 분석을 통해 볼 때 진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랜도 교수가 반박했다. “나는 폴락의 작품 매매에 관여해 본 일이 없다. 나는 아트 딜러가 아니라 평판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미술사학자이다.” 재단이 작품의 수급 조절을 통해 사실상 가격 통제에 나설 의도로 작품의 진품성을 부정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진위 감정은 안목 감정을 넘어 과학 감정을 넘어 어느 새 시장 원리의 지배하에 놓여 있음을 말한 것이다. 언젠가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다. “은행가들은 식사를 하며 예술을 논하고, 예술가들은 식사를 하며 돈을 논한다.”
안목 감정의 전성기가 있었다. 과학적 분석이 나타나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학적 분석 또한 결정적이거나 단정적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역시나 여러 증거들의 하나일 뿐이다. 이제 다시 진위 감정은 학자와 연구자들의 몫으로 되돌아 가나 싶었다. 그런데 여기에 시장의 지배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다시 문제의 폴락 작품으로 되돌아 가자. 진위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현재까지 흐름은 대체로 폴락의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가능하면 우리 법정의 우리 작품 사례로 글을 써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예술법과 예술 법정은 미성숙 단계다. 시장도 그러하다. 거기다 예술가도 갤러리도 컬렉터도 예술시장마저도 권리 개념에 익숙지 않다. 법과 예술은 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검찰과 법원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우를 범한다. 예술법 전문가라지만 이우환, 천경자 작품의 진위 판정에 결정적 의견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문제의 재발을 줄여나갈 수 있는 몇몇 대안은 있다.
첫째, 예술가다. 위작 논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예술가 자신이다. 작가야말로 기록자가 되어야 한다. 문자로, 영상으로, 창작일지로, 거래 명세서로, 도록으로, 혹은 작품 어느 구석에 암호로라도 기록을 남겨야 한다. 해외 작가들의 경우 어떠한 경우에도 진품보증서가 작품과 동행할 수 있도록 해둔다.
둘째, 갤러리와 경매회사 같은 아트 딜러들이다. 작품의 탄생에서 소멸까지 모든 권리 관계에 대한 증명이야말로 이들의 몫이다. 감정보증서 발행은 필수다. 가격 및 작품 정보를 아카이빙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작품이 작가의 스튜디오를 떠난 이후부터 모든 이력과 정보에 대한 기록은 이들의 몫이다. 이것이 바로 프로비넌스(Provenance)다. 프로비넌스는 작품의 탄생에서 마지막 소장자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기록한 문서다. 그런데 우리 예술계에는 이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비넌스의 존재 이유는 투명성이다. 그런데 불투명성이야말로 한국 예술계의 속된 흐름이다.
셋째, 전문가다. 단색화 전문가, 민중미술 전문가 등 전문가가 키워져야 하고 스스로 자라나야 한다. 예술계와 학계의 공동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예술품 거래, 유통, 세무, 금융, 투자 등 예술 비즈니스 관련 전문가군도 늘어나야 할 것 같다. 국가의 개입을 통해 감정, 유통 등 현존하는 예술계의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예술 행정이 예술 시장을 앞지르긴 쉽지 않다. 국가는 지원하되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것 또한 국제 예술계의 분명한 흐름이다.
넷째, 컬렉터다. 예술 작품의 마지막 안식처다. 현대 자본주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상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예술가와 작품과 갤러리와 경매회사 정보에 대한 접근은 온전히 컬렉터의 몫이다. 시장의 흐름도 놓칠 수는 없다. 이렇게 취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고 결정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 져야 한다. 이 모든 건 무한 책임이다.
캐슬린 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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