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개발 끝에 첨단 필터 개발
수출입ㆍ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선
매출ㆍ신용 저조 이유로 대출 거절
시중은행은 담보ㆍ보증 요구 ‘퇴짜’
금융권 보신 문화 개혁 없인
中企ㆍ스타트업 육성 힘들어
대전 대덕테크노밸리에서 탄소나노튜브(CNT) 소재 연구개발 기업 ‘아이앤테크’를 운영하는 양효식(52) 대표는 최근 개인투자자를 찾아 이리저리 뛰고 있다. 신기술을 개발해 정부 인증에 수주 계약서까지 받았지만 금융권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신생기업을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도입한 정부의 제도도, 이를 뒷받침하겠다던 금융당국의 지원 약속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업 시작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한쪽 손에 ‘50억원 규모 수주 계약서’를, 다른 손에는 ‘금융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들고 있다.
2005년 회사를 설립한 양 대표는 CNT를 기반으로 한 환경유해 요소 제거용 필터 개발에 뛰어들었다. 정유회사는 물론 수(水)처리, 자동차, 의료분야까지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5년 간의 연구개발 끝에 2010년 공해의 주요 원인인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제거, 정수 및 폐수처리, 대기 및 공기정화, 배기가스 정화, 미세먼지 제거 등에서 성능을 인정받은 CNT 필터 개발에 성공했다. 이듬해 4월에는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첨단기술ㆍ제품 확인서’를 획득했고, 무려 12개에 달하는 특허도 받았다.
그리고 작년 8월 드디어 중국 국영석유기업인 중국석화를 상대로 수주 계약을 따냈다. 1차로 개당 50만원으로 필터 1만개를 납품하는 50억원 규모 계약이었다. 10년 넘는 노력의 첫 결실이었다. 직원 10여명의 조그만 기업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제품을 생산하는 일만 남았다.
“이제는 정말 됐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 후부터가 가시밭길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양 대표는 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을 찾아가 기술금융대출과 운용자금, 원자재 구입 자금 지원 등을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매출이 저조하고, 수출실적이 없고, 자본이 부족하고, 신용이 낮다는 이유였다. 정부 인증서나 50억원 계약서는 이런 이유들 앞에선 그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시중은행 역시 문턱이 높긴 마찬가지였다. 담보나 보증이 없으면 대출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기술만 있으면 돈을 빌려준다며 도입된 기술금융도 양 대표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한 기술평가기관에서 받은 기술등급은 1~10등급 중 6등급. 기술 평가(40%)보다 재무 평가(60%)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따른 결과였다. 양 대표는 “중소기업, 수출기업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약속과 기술만 있으면 지원하겠다는 금융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정부와 금융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관련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첨단기술ㆍ제품 확인서는 기업들이 대출에 활용할 수 있는 인증이긴 하지만, 대출은 개별은행 내부 규정에 따른 것”이라며 “정부가 금융회사들에게 지원해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금융사들 역시 “충분한 검증 없이 모든 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는 없다”고 하소연한다. ‘비 올 때 우산을 뺏지 말라‘지만 부실이 늘어나면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단지 기술만 믿고 돈을 빌려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선 회수 가능성이 가장 중요한데 신용이 없는 기업이 최초의 기술이라거나 수백억원 짜리 수주 계약서를 가져온다고 해도 섣불리 대출해주기 어렵다”며 “각종 기술 인증도 이미 수 만 개에 달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주계약까지 맺은 상황에서 자금을 구하지 못해 제품 생산을 못하는 건, 그만큼 지금의 제도가 경직돼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임은 분명하다. 부실 대출에 대해서는 책임 추궁이 끝까지 이뤄지는 현실에서 보신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윤석헌 전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금융권의 보신 문화를 개혁하지 않고는 수출ㆍ중소기업 성장이나 스타트업 육성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수주 계약 이후 생산자금을 구하지 못한 양 대표는 결국 신용대출 4,000만원을 갚지 못해 최근 채무불이행자가 됐다. 박사급 연구원 직원 12명도 하나 둘 회사를 떠나 이제 양 대표 혼자만 남았다. 재기를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지만 결실을 장담하긴 어려운 처지다.
“대기업인 해운ㆍ조선업에 쏟아 넣은 수십조원 중 일부만 기술기업 100곳에 투자하면 대한민국 경제는 달라질 겁니다. 저는 금융 지원을 포기하고 최악의 경우 기술 이전을 조건으로 중국 투자자들의 자금이라도 빌리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습니다. 저 같은 중소기업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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