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충재
논설위원

등록 : 2017.09.25 16:30
수정 : 2017.09.25 17:10

[이충재 칼럼] MB가 무사했던 이유

등록 : 2017.09.25 16:30
수정 : 2017.09.25 17:10

블랙리스트, 국정원 공작은 빙산 일각

4대강ㆍ자원외교ㆍ방산비리 흑막 여전

늑장 심판에 ‘정치보복’ 규정 말 안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에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무책임한 태도다.

감독 최승호 PD가 그를 찾아가 공영방송이 망가진 책임을 묻자 “그건 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지”라며 둘러대는 장면이다. MBC와 KBS 사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고 정권 편향적 방송을 해 파업과 해직 사태가 반복된 것을 이 전 대통령은 진짜 몰랐을까.

박원순 서울시장이 국정원의 ‘박원순 제압문건’ 작성에 항의해 이 전 대통령을 고소하자 MB 측에서 나온 반응은 “대통령이 그런 일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MB와의 무관함을 강조한 것인데 정치권 거물인 서울시장에 대한 ‘공작’을 대통령 모르게 진행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이 전 대통령의 발뺌은 본격화하고 있는 검찰 수사에 난관을 예고한다. ‘국정원 댓글 공작’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원순 제압문건’ 등에서 MB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그의 행태로 볼 때 물증 확보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핵심 참모였던 정두언 전 의원은 “MB가 굉장히 신중하고 약았다”며 비관론에 힘을 실었다. 그의 말대로 “자국 같은 거 잘 안 남기고 웬만하면 다 밑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이 MB이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 지금보다 훨씬 용이했던 시기가 있었다. ‘사익 추구’의 흔적과 악취가 곳곳에 남아 있어 입증자료와 진술이 상대적으로 풍부했다. 22조원을 쏟아 부은 4대강 사업과 31조원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하거나 국고 손실을 끼친 ‘자원 외교’, 수천억 원에 달하는 무기 도입 의혹은 비리와 범죄 개연성이 높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의혹은 흑막에 가려진 채 그대로 묻혔다. 권력 감시기구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을 풀어줬다 뒤통수를 맞는 모습을 지켜본 MB 정부는 검찰을 철저히 장악했다. 목줄을 세게 쥐는 주인이 나타나자 고분고분해진 검찰이 정권 비리에 눈을 감는 건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나마 정당한 심판이 이뤄졌으면 모르겠으나 뚜껑을 열려다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사적인 감정으로 볼 때 철저한 단죄가 뒤따라야 마땅한데도 감싸고 돌아 의구심을 낳았다. 이념의 동질성 차원을 넘어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던 것이 균형점으로 작용한 듯하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뒤늦은 수사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는 건 그래서 터무니없다.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의당 파헤쳐야 할 비리를 덮음으로써 사실상 ‘공소시효’가 정지된 셈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데 대한 보복 심리라는 주장도 정치 공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야 할 국정원이 정권 유지를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를 수사하는 것을 보복이라고 할 국민이 얼마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공직자범죄수사처를 만들자는 것도 정권의 비리를 그 정권이 건재한 시기에 찾아내 단죄하자는 뜻이다.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못하는 것을 공수처가 하도록 하자는 요량이다.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란 말을 사라지게 하려면 정권의 비리가 드러나는 순간에 바로 처벌하면 될 일이다.

과거 정권이라고 불법을 봐주면 그때그때 권력에 줄 서기만 잘하면 된다는 나쁜 교훈을 심어주게 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심판과 청산이 되지 않으니 적폐가 쌓여 가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공통점은 권한과 지위를 남용해 국가 근간을 흔들고 민주주의 본질을 훼손했다는 데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언론 통제,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사찰과 배제에, 정권의 노골적인 탐욕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강준만 교수 표현에 따르면 한국을 상징하던 ‘발전 국가’를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공물을 빼앗는 ‘약탈 국가’로 후퇴시켰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깊이 새겨야 할 충고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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