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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박제화와 성공의 정치학

입력
2016.05.2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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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 ‘이미지의 삶과 죽음’(1992).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는 1980년대 정치사회 변혁기에 일어난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인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태도를 짚어본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박찬경 ‘이미지의 삶과 죽음’(1992).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는 1980년대 정치사회 변혁기에 일어난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인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태도를 짚어본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미술은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미술 자체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정치, 사회적 입장에서 시대에 관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민중미술’은 미술이 정치적 입장 아래 시대에 적극 참여하고 발언했던 자생적 미술운동이랄 수 있다. 형식적으론 리얼리즘을 포용해 자의식을 드러내려 했던 미술이자,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과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이 빚어낸, 정치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예술이기도 했다.

민중미술은 미술이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의 발로였다. 따라서 민중미술 작가들은 불안하고 폭력적인 사회현실 속에서 미술가의 역할을 재정립하려 했으며, 당대 민중의 상식과 괴리되지 않은 발언으로 미술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민중미술의 이러한 지향성은 국민의 저항과 열망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에 수용되었고 민주화를 이끄는데 크게 일조했다.

당시 민중미술 작가들이 다룬 주제는 “침묵의 저항이었다”는 궤변과는 달리 자기 안위적인 속성과 자기수양에만 골몰한 이전 1970년대 한국 모노크롬 작가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격변하는 정치사회 속에서 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화실을 벗어나 ‘현장’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소득분배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는 농민과 도시빈민, 노동자들의 어두운 삶을 조명했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본래 여러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강령으로 내세운 ‘민중’이라는 개념의 실체적 모호함, 대치적 개념의 계급투쟁에 이은 유물변증법적 인식과 관점에서의 편향적 민중성, 미적 자율성의 상실과 예술 사고의 경직성, 정치 노선에 예속되는 치명적 결함 등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나아가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을 통한 제도권으로의 진입은 논리 모순과 양식화에 젖어 제 맥락을 놓친 채 표류하던 민중미술을 서서히 세월 뒤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랬던 민중미술이 다시 점화되고 있다. 지난 1월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2: 리얼리즘의 복권’전을 시작으로, 김정헌, 주재환, 최민화, 강요배, 김봉준 등 1980, 90년대 활동한 민중미술 작가들의 전시가 연이어졌다. 여기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도 최근 민중미술 관련 전시인 ‘가나아트 컬렉션’, ‘사회 속 미술-행복의 나라’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최하는 등 ‘민중미술의 붐’에 힘을 보태고 있다. 언뜻 보면 민중미술의 재도래요, 돌아온 황금기처럼 비춰질 정도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의 ‘민중미술’은 동시대적 개연성이 희미하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전시 수는 부쩍 늘었으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당대 민중’을 복기할만한 기회는 비례하지 않는 대신 여전히 과거에 머문 박제된 회상의 미술, 대중과 제도권이 제공하는 달콤한 성공의 정치학 아래 놓여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근래엔 상업적 이익을 우선하는 대형 화랑들이 쏘아 올린 신호에 서울시립미술관과 같은 공공기관마저 가세하는 어색한 형국도 눈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빤히 보이는 화랑들의 ‘민중미술 띄우기’를 민중미술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표어화하는 방식으로 가리려 하지만, 결국 단물 다 빼먹은 단색화에 이은 화랑들의 장삿속에 승차하는 셈이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민중미술을 80년대 특정 시기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반민중적 시각”이라는 임옥상을 비롯해, 황재형, 안창홍, 정복수 등 작가들 중에는 ‘민중’이 아닌 ‘대중’의 안락함과는 관계없이 현재의 정치사회적 양태를 미술로 소환하고 있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리슨투더시티, 박찬경, 노순택, 배영환처럼 포스트민중미술이라는 용어로도 묶기 어려울 만큼, 집단적 동일성을 찾는 대신 각자의 방식과 태도로 다층적, 공동체적 존재로서 사회적 맥락에 침투하거나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예술을 잇고 있는 작가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둘러싼 환경은 갈수록 성공의 정치학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시스템에 의한 작가와 구조 간 유대 또는 예속 관계가 심화되고, 실험적 장의 퇴출과 맞물린 시장 논리와 자본 논리가 미술을 포함한 문화 영역에 영향을 끼치면서 직접적 사회 담론은커녕 훼손되어서는 안 될 작가들의 개성 및 움직임마저 둔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민중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리얼한 세상을 리얼한 눈과 정신으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실천적으로 구현해주길 바라는 건 어쩌면 욕심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린 박제화와 성공의 정치학 사이에 서 있는 민중미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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