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까지 회사가 적자를 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공장이 여전히 최대 가동 중이지만 회사 전체에 위기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생산량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예전만큼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죠.”
정유업계에서 20년 일해온 김 모씨는 요즘 경기 변화를 실감한다. 꾸준히 오른 국제유가 덕에 일하는 족족 수익으로 이어졌던 과거와 달리 유가가 떨어지며 불투명해진 세계 시장 탓에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정유업계만이 아니다. 수출 중심으로 우리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주력산업이 모두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주전들을 대체할 ‘교체선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주력산업의 ‘다이내미즘(역동성)’ 상실이 우리 경제에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계 맞닥뜨린 13대 주력 산업
정유업계는 지난해 수출물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저유가가 지속되면서 수출단가가 하락해 총 수출실적이 전년 대비 36.6% 줄었다. 그나마 수입한 원유 가격 대비 석유제품 가격(정제마진)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지난해 영업이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크게 상승하진 못하고 수요 증가세도 정체될 것으로 예상돼 지난해보다 손익이 나빠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유(석유제품)는 석유화학, 섬유, 컴퓨터, 무선통신기기, 일반기계, 자동차, 자동차부품, 가전, 반도체, 선박, 철강, 평판디스플레이와 함께 정부가 2006년 선정한 우리나라 13대 주력산업에 속한다. 지난 10여년간 이 산업들은 정책 보호를 받으며 우리나라를 세계 6위 수출국으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 전문가들은 주력산업의 성장잠재력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진단한다. 김도훈 산업연구원장은 “세계시장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주력산업계의 경쟁력이 한계에 맞닥뜨렸다”며 “다이내믹(역동적인) 코리아는 옛말이 됐고 지금은 스태틱(정적인) 코리아”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무선통신기기와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 주력산업이 크게 부진해 수출이 전년 대비 7.9% 감소했다. 철강과 디스플레이, 자동차, 일반기계 등은 공급과잉과 신흥국 경기둔화라는 직격탄을 맞았고 유가영향 품목인 석유제품과 석유화학은 저유가 때문에 단가가 크게 떨어졌다.
올해도 수출 증가세는 소폭에 그칠 전망이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세계시장의 수요 둔화, 전세계적인 공급 확대, 중국 등 후발국과 경쟁 심화, 엔저와 저유가 장기화, 업체 간 경쟁 격화 등 경기적,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올해도 수출 부진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생존 급급한 주력선수들
주력산업의 중장기 성장 속도도 하락세가 뚜렷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산출한 산업 분야별 추세성장률을 보면 주력산업인 중공업과 화학공업이 각각 4.2%, 3.2%로 제조업 전체 평균(5.4%)보다 낮다. 추세성장률은 경제학에서 산업계에 영향을 미치는 단기적 요소들을 제외하고 중장기적 성장 속도나 방향만 뽑아낸 수치다. 즉, 얼마나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를 나타낸다.
중공업 추세성장률은 1970년대 20.6%에서 2010년대 4.2%까지 낮아졌고 화학공업 추세성장률은 1970년대 12.3%에서 2010년대 3.2%로 뚝 떨어졌다. 추세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유지하는 업종은 전자뿐이다. 하지만 전자산업도 추세성장률이 1970년대 29.0%에서 2010년대 10.0%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석유화학과 철강, 조선업은 오래 전부터 공급과잉 난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동차도 수요부진 국면에 진입했다. 특히 기술혁신의 원천 역할을 해온 정보통신(ICT)은 경제성장 기여율이 2013년 1분기 40%에 이르렀다가 지난해 상반기 1% 안팎에 그쳤다는 분석이다.
수출품목 변경 둔화세 확연
이처럼 주력산업들은 성장이 꺾였는데 수출 의존도는 거꾸로 더 올라갔다. 한국무역협회 에 따르면 10대 주력산업이 우리나라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55.9%에서 2014년 86.3%로 확대됐다.
주력산업의 세부 수출 품목들도 변화가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시기별로 30대 수출 품목을 뽑아본 결과 2010년에는 2000년과 비교했을 때 13개 품목이 달라졌지만, 2010년 이후 바뀐 품목은 3개뿐이다. 새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한 채 기존 수출 품목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은 “산업 구조가 주력산업 위주로 고착화해 역동성이 떨어진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기 위해 여러 정책들을 폈지만 아직 가시적 성과가 부족하다. 화장품과 의약품, 반도체 장비 등이 새로운 유망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으나 주력산업을 대체하기에 역부족이다. 조철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연구실장은 “신산업만으로 당장 경제성장이 쉽지 않다”며 “기존 주력산업의 물량을 줄이고 금액을 늘리는 고부가가치 전략으로 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대표적 사양산업으로 꼽혔던 섬유ㆍ가죽산업이 최근 고기능 섬유 개발 등으로 추세성장률이 2000년대 1.8%에서 2010년대 3.7%로 높아졌다”며 “쇠퇴하던 산업도 가격경쟁력 제고, 생산구조 고도화 등 고부가가치화하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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