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 과학과 예술의 경계 뛰어 넘은 선언
“대중은 아무 예술가나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즘과 기타의 경로를 통하여 이미 신화화된 예술가를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존경 받는 예술가 치고 신화화하지 않은 예술가가 있는가.”(백남준 인터뷰, 1999년)
백남준은 이미 한국에서 ‘신화화된 예술가’이다. 젊은 날의 백남준은 “충격을 주지 않는 작품은 아트도 아니다”라는 뒤샹의 말을 신봉하였다. 30대의 이 젊은 청년은 “살아있는 암고래의 질”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온갖 기행을 시도하였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문 뒤샹의 뒤를 이어 백남준은 다다이즘의 마지막 출구로 비디오를 생각했다. 트랜지스터 혁명을 통해 만개된 전자의 시대는 텔레비전을 넘어 예술과 문화로 진입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맥클루언은 텔레비전의 전지구화 시대를 선언하였다. 전자기술의 발전은 음악과 미술 모두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았다. 왕성한 실험이 이루어졌고 예술과 일상, 과학과 예술, 기계와 인간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존 케이지는 소음과 악음의 구분을 무너뜨렸고 무음까지도 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사이버네틱스의 전자 기술을 이용하여 음악을 만들고 이미지를 생산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사람들은 전자기술을 활용하여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고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창작과 연주도 이루어졌다.
전자시대의 총아 텔레비전을 해킹
백남준은 1960년대 텔레비전의 시대에 ‘마그네틱 TV’와 ‘참여 TV’ 같은 실험을 통해 텔레비전 영상에 개입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는 기계의 내부 회로를 바꾸거나 자석으로 브라운관의 전자 배열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영상 무늬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영상에 간섭함으로써 ‘기존의 것’을 변형하였다. 이미 결정된 것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텔레비전 대중화 시대에 선구적으로 비결정성의 실험을 전개한 것이다. 그는 자석을 직접 화면에 접근시켜 영상을 변형하는 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엔지니어 슈야 아베와 함께 영상 신시사이저를 개발하는 전문적 시도로 확대해 나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백남준은 텔레비전 시대의 해커였다. 해커 백남준은 다다가 전개했던 콜라주를 전자적으로 확장하였다. 그는“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런 실행이 비록 사회적 교란망으로 확장되지는 못했지만 그 자신의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텔레비전에 대한 개입과 간섭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백남준 초기 비디오 아트의 출발점이자 핵심이다. 이런 시도에는 플럭서스와 아방가르드 정신이 살아있었다. 그는 통신과 예술의 교집합에서 미디어아트라는 신예술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런 시도는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맥클루언의 미디어론을 예술적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기계와 인간ㆍ자연의 대립과 융화
“비디오도 과학적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그의 사상은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사용”하게끔 만들었다. 그는 1960년대 전자 시대를 대표하는 텔레비전을 예술적으로 전유하고 그것의 의미를 뒤집기 시작했다. 그의 설치 작품을 통해 텔레비전은 오브제로 변형되었고 다양한 선택과 배열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 재창조되었다. ‘멀티모니터’ 설치를 통해 사물의 축적을 통한 양질 전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TV 부처’를 통해 텔레비전과 인간을 대면하게 하여 텔레비전 모니터 앞에 앉은 인간에게 TV 시대의 해탈이란 화두를 던져주었다. 백남준의 오브제는 첼로를 연주하는 알몸의 여인으로, 부처로, 때로는 식물로 바뀌면서 기계와 인간, 기계와 자연의 대립과 융합을 모순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는 그의 태도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남준 작품의 대단한 점 중 또 하나는 고급스러움과 저급함, 복잡함과 단순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신나게 넘나들었다는 데 있다. 어떤 작품이 한없이 진지하다면 또 어떤 작품은 아이가 만든 작품처럼 단순하다. 작품을 만들며 이용한 테크놀로지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처럼 숭배하다가도 어느 순간 뻥 하고 차버렸다.”
삶과 다르지 않은 머리로 해낸 예술
1984년 1월1일에 그는 세계화의 입구에서 위성방송을 통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내보냈다. 전두환의 공포통치가 정점에 달하던 1984년 한국에서 비디오예술과 전위 예술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1990년대 들어 세상은 텔레비전 시대에서 인터넷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1974년에 록펠러재단 프로젝트를 위해 ‘초고속 정보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1991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우리 몸은 1㎝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생각을 옮기는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정주 유목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인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그런 시대가 코 앞에 다가왔다. 1994년에 백남준은 멀티모니터 작품 ‘WWW’를 발표하고 1995년에는 ‘전자초고속도로’를 전시하였다.
뇌출혈로 몸이 온전치 않을 때인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 초대되어 클린턴과 인사하는 도중 그의 바지가 흘러내렸다. 두 대통령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희대의 퍼포먼스가 의도이든 실수이든 실제로 벌어졌다. 그의 실제 삶과 행위 예술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사례다. 이런 예술은 손으로 하기보다는 머리로 하는 작업이다. 퍼포먼스나 설치작업은 그림보다는 악보에 가깝다.
그 후 세상은 인터넷 시대를 거쳐 스마트폰의 시대로 바뀌었다. 그는 스마트폰의 대중화 시대를 앞 둔 2006년 이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제2의 백남준에 의해 그의 ‘비디오 아트’을 잇는 ‘스마트폰 아트’가 생겨날 것이다.
“한국에 대한 애정을 말하지 않는다”
백남준은 자신의 정체성 안에 한국적 원초 체험을 결합하였다. 그는 텔레비전과 부처를 연결하고 무당과 돼지머리를 섞어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스스로 선과 굿을 실행하였다. 그는 현대적 삶의 조건을 물으면서 자신을 그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것은 정체성을 내다 버리면서 얻은 열린 정체성이다. 홍콩 출신 미국 사진가 쳉퀑치(曾廣智)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표출하며 상황과 어긋나는 자신의 모습을 지배 체제와 대비시켰다.
한국 출신 미국 아티스트 백남준은 동양이나 한국의 정체성을 업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절대로 발설하지 않고 참는다. 한국을 선전하는 길은 내가 잘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면에서 애국의 길을 너무 노골화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외국으로 가서 유명해지고 신화가 된 한국인들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언제 왜 외국으로 갔는가에 달려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예술가에 대한 한국적 평가와 그 밑에 담긴 정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한국인을 접했다. 그런데 왜 유독 세계적 수준의 한국인이어야만 하나? 그냥 세계적 수준이 도달하는 높이와 깊이 자체를 즐기면 안될까? 우리는 유독 세계적 수준에 약하다. 특히 그 세계적 수준이라는 걸 이끄는 미국에 약하다. 물건도 인물도 예술도 미국을 거쳐 들어와야만 쉽게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백남준도 미국을 거쳐 들어온 수입물이란 점이 내내 아쉽다.
얼마 전 그의 반려 구보타 시게코가 생을 마쳤다. 그녀는 백남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명석한 철학자이고 훌륭한 재담가였다. 아주 지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사람을 전혀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예의 바르고 조용한 사람이다. 스마트하고 달콤하고 재미있고 섹스를 잘하는 남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백남준이 해준 말. “시게코, 넌 젊어선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선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 그가 죽은 후 한국에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백남준 아트센터)”이 지어졌다. 그가 그곳에서 오래 살 수 있을지, 잠시 왔다가 갈 지는 우리가 그를 대하는 수준에 달렸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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