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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16> 세계 최대의 방송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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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16> 세계 최대의 방송사고

입력
2011.01.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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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들도 자칫하면 방송사고를 낼 수 있다. 노련한 아나운서들도 뉴스 도중 웃음을 참지 못한다든지, 캐스터나 해설자가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사적인 대화를 한다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다. 녹화 프로그램에서는 방송사고를 내더라도 얼마든지 수습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생방송이다. 생방송에서 사고가 나면 수습할 방법이 없다.

스포츠 중계는 늘 생방송이다. 때문에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방송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긴장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사고는 나게 마련이다. 방송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해설자의 실수는 대부분 말에서 비롯된다. 투 아웃인데 "지금 스퀴즈 번트라도 대서 한 점을 뽑는 게 나을 겁니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도 있다.

한때는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네요"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했는데, 삼천포(통영) 쪽의 항의로 요즘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최근 들어서는 통영에서 관광 홍보를 위해 도리어 "삼천포로 빠지라"고 하기도 한다. 사실 나는 사소한 말실수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사고를 쳤다 하면 주로 대형이었다. 아마 전세계 스포츠 역사상 가장 웃지 못할 사고를 친 장본인이 내가 아닌가 싶다.

1983년 일본 오사카에서 한일 고교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나는 정도영 캐스터, 담당 PD, 통역과 함께 스탠드 상단에 위치한 중계석에서 방송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 오늘 날씨 무지하게 덥네요. 일본이 한국보다 더 더운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끈적거리고 후텁지근한 게 오늘 중계하기도 굉장히 힘들겠는데요." 우리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날은 너무 더웠다. 나는 경기 전 음료수 대여섯 병을 들이켰지만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경기는 박진감 있게 진행됐다. 나도 신바람을 내면서 해설을 했다. 그런데 경기 시작 후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갑자기 담당 엔지니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나는 '아이고, 저 친구 더위 먹었구만'이라며 엔지니어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엔지니어는 도리어 나에게 뭔가 말하는 것 같았다. 생방송이라 끼어들 수 없었던 엔지니어는 이어폰에 대고 "거꾸로, 거꾸로"를 반복했다.

도대체 뭐가 거꾸로 됐단 말인가. 일본선수 이름도 아니고. 나는 그때까지도 '저 친구가 많이 아프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뒤 엔지니어는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지금 팀을 바꿔서 중계하고 있음. 서울에서 연락이 왔음.'

나와 정도영씨는 동시에 눈길을 마주쳤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엔지니어한테 '무슨 말이냐'고 사인을 보냈고, 엔지니어는 다시 쪽지를 건넸다.

'한국을 일본으로, 일본을 한국으로 방송하고 있었음. 바로 정정할 것.'

나는 지금까지 홍길동을 나카무라로, 이마카라를 임꺽정으로 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송 중계부스는 스탠드 맨 꼭대기에 있어서 선수들의 식별이 쉽지는 않았다. 양팀 모두 유니폼이 비슷해서 분간이 어려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변명이 안 됐다. 더구나 현장에서 경기를 4명이나 지켜보면서도 선수를 식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뭔가에 홀린 게 분명했다.

방송국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화면을 처리하는 PD는 그런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친선경기라 유니폼을 바꿔 입은 게 아닐까요. 현장에 사람이 몇인데 틀리겠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데 한 선수의 가족은 울먹이며 PD에게 호소했다. "아니 제 아들이 어떻게 나카무라입니까? 중계 제대로 하는 것 맞습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그제서야 우리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도영 캐스터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한국팀으로 소개했던 팀은 일본이었고, 일본으로 소개했던 팀이 한국팀이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날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방송이 끝날 때까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야 잘리더라도 체육교사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아나운서나 엔지니어는 새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도 됐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경기 내내 끌려가던 한국은 8회 군산상고 조계현이 만루에서 역전 3루타를 뿜었고, 한국은 극적인 역전승을 올렸다.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역전 결승타였다.

조계현의 3루타로 우리의 대형사고는 일순간에 날아갔다. 방송국 높은 분들도 조계현의 한방이 터지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었다고 한다. 나는 나중에 조계현에게 "네가 내 은인이다"라며 껴안았다. 나중에 사고 경위서를 본 방송국의 한 고위간부는 눈을 찡긋하?"생방송을 하다 보면 실수가 있을 수 있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요. 뭐 없던 일로 합시다."

그렇지만 나의 사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대문구장에서 아마야구를 중계하던 때였다. 경기 도중 담당 PD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꼬깃꼬깃한 쪽지를 내밀었다. 경북 경산에서 열차 사고가 나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나운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열차 사고가 났군요."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참 오랜만에 크게 터졌군요."

마치 열차 사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걸 본 시청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방송국은 빗발치는 항의전화로 업무가 마비됐고, 나와 아나운서는 경위서와 함께 약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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