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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하나회 척결

입력
2016.03.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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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3월 8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하나회를 척결을 시작했다. 군 사조직과 정치군인에 대한 그의 응징은 단순하리만치 철저했다. 자료사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하나회를 척결을 시작했다. 군 사조직과 정치군인에 대한 그의 응징은 단순하리만치 철저했다. 자료사진

1993년 3월 8일 오전 7시 30분, 갓 취임한 김영삼(이하 YS) 전 대통령이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과 청와대에서 독대했다. 알려진 바, YS는 군인들도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하냐고 물었고, 권 장관은 명령 하나면 된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YS는 “아 그래요, 그럼 됐구만. 내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꾸겠습니다.(…) 당장 예편 준비하라고 하세요.” 그 전격적인 인사가 하나회 척결과 군 숙정의 신호탄임을 알아챈 이는 군은 물론 청와대 내에도 드물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의 바통을 받아 3당 합당으로 대선 후보가 됐고,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즐비했던 당시 민주정의당의 지원으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2월 25일)한 지 불과 열 하루만의 일이었다.

YS는 앞서 3월 4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실추된 군과 육군의 명예를 바로잡고(…) 다짐합니다.” 그 대목에서 움찔했던 이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나회의 기세가 그렇게 등등했다.

12.12 직후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물론 저들 대다수가 "형님" "동생"하던 하나회였다.
12.12 직후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물론 저들 대다수가 "형님" "동생"하던 하나회였다.

하나회는 51년 입학한 첫 4년제 육사생도(11기) 중 영남출신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이 만든 ‘오성회’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63년 3월 김복동(노태우 처남) 당시 소령의 집에서 막걸리로 결의를 다졌고, 모두 하나가 되자는 의미로 하나회란 새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회칙은 한 마디로 충성과 단합이었고, 회장은 줄곧 전두환이었다. 앞서 오성회는 5ㆍ16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의 마음을 샀다. 그들은 정권의 비호 하에 군 요직을 독식하며 세를 과시했고, 세에 비례해 부패해갔다. 그 끝이 10ㆍ26 직후의 12ㆍ12 군사반란과 5ㆍ17 쿠데타, 그리고 5ㆍ18이었다. 그 세월을 누구 못지않게 험하게 보낸 정치인 YS가 하나회를 벼른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분노는 명료하고 집요했다.

4월 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19기) 전역조치, 4월 8일 1군사령관 3군사령관 제2작전사령관 보직해임. 4월 15일 하나회 출신 군단장과 사단장 거의 전원 강제 전역…. 7월에는 하나회 영관ㆍ위관급 장교들까지 색출해 예편시키거나 좌천시켰다. 가히 전격전을 방불케 하는 숙군 행보였다. 당시 주요 군부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24시간 비상대기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훗날 알려졌다.

YS는 과(過)도 많았지만, 그 시기 꼭 필요한 일을 해낸 대통령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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