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케냐타 대통령 강행 의지에
선관위ㆍ대법원은 연기 요구 묵살
야권 투표 거부, 2차 대선도 파행
오딩가 지지자 투표소 폐쇄 시위
최소 3명 사망, 부상자 20여명 넘어
10년 전 1100명 참사 재연 우려
“승자 없는 선거.”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26일(현지시간) 치러진 케냐 대통령 재선거의 결말을 이처럼 암울하게 표현했다. 사법부가 8월 실시된 대선이 불공정하다며 재선거를 명령했을 때만 해도 아프리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 올릴 기회로 전세계의 기대를 모았지만, 선거 준비 과정에서 갈등의 골만 깊어져 오히려 케냐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가중됐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부정 선거를 비난하는 유력 야권 후보가 선거를 포기하면서 서릿발 같은 현직 대통령(우후루 케냐타)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된 채 열린 케냐의 두번째 대선은 끝내 동아프리카의 정치 모범국으로 칭송 받을 수 있었던 케냐의 위상을 주저앉힌 것은 물론 나라를 둘로 쪼갤 불씨가 됐다.
케냐 선거관리위원회는 전날 “26일 새로운 대선 투표를 진행하겠다”며 선거 강행 의사를 밝혔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선관위가 공정한 시스템을 마련할 때까지 대선을 미뤄야 한다는 야권의 개혁 요구를 끝내 묵살한 것이다. 대법원도 인권단체 등이 대선 시행일을 연기해 달라며 낸 청원의 심리를 판사 정족수 미달을 이유로 포기했다. “몸이 아프다” “보디가드가 없어 심리에 참여할 수 없다” 등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설명이 뒤따랐다.
야권 대표로 나섰던 라일라 오딩가 후보는 즉각 선거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는 수도 나이로비에서 지지자 수천명을 모아 놓고 “재선거는 케냐타 대통령의 ‘쿠데타’이다. 투표에 참여하지 말라”며 불복종 운동을 촉구했다.
지난달 대법원은 1차 대선에서 “선관위 전산망이 해킹 당해 선거결과가 조작됐다”는 야권의 이의 신청을 받아 들여 케냐타 후보의 당선을 무효화한 뒤 60일 내 재선거를 결정했다. 2007년 대법원이 부정선거 의혹을 외면해 1,100여명이 숨지는 최악의 유혈사태를 낳았던 선례를 뒤집자 사법부의 신뢰도를 높였다는 찬사가 잇따랐다. 하지만 “재선거에서도 이길 경우 사법체계를 손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케냐타 대통령의 한 마디에 정국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선관위 인적 구성 변화 등 공정성을 담보할 절차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게 야권의 주장이다. 인권단체들은 대법원이 대선 연기 요청 심리를 회피한 것도 케냐타 대통령의 압박에 굴복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비영리 단체 국제위기그룹(ICG)의 무리티 무티가 연구원은 “케냐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로 통합할 선거가 사라졌다. 이제 패자만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재선거는 예상대로 ‘반쪽 짜리’ 선거로 진행됐다. AFP통신은 이날 한산한 투표소 분위기를 전했다. 8,000명의 유권자가 등록된 나이로비의 한 투표소에서는 50여명만 투표를 마쳐 수시간 장사진을 이뤘던 1차 대선 때와 대조를 이뤘다. 유혈 충돌도 벌어졌다. 나이로비와 서부 도시 곳곳에서 경찰은 최루가스를 쏘며 반정부 시위대를 진압해 부상자가 속출했다. 나이로비 키수무 지역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시위 참가자 1명이 숨지고 최소 3명이 다쳤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나이로비 마다레와 서부 호마베이에서도 적어도 각각 1명씩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전체 부상자도 20명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신들은 케냐타의 당선이 확정되면 시위가 더욱 확대돼 10년 전 대선 참사가 재연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케냐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격렬한 두 달을 겪으면서 투자가 실종되는 등 경제마저 파탄이 났다”며 “각각 케냐타, 오딩가로 대표되는 키쿠유와 루오, 양대 민족의 분열ㆍ대립 역시 심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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