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근로자의 날 대통령 후보를 고른다면

입력
2017.04.30 10:14
0 0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전에 캠퍼스 게시판 여기 저기에 신입사원 모집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었다. 졸업을 앞둔 우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포스터를 기웃거렸다. 포스터에는 4년제 정규대학 졸업 또는 예정자, 병역필 또는 면제자, 19XX년 이후 출생자 등의 응시자격이 적혀 있었다. 그 때는 지원하려는 기업에 직접 가서 입사지원서를 받아와 쓰고 다시 직접 제출했다.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도 없던 1980년대 말의 일이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어마어마한 핸디캡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여자는 아예 지원자격도 주지 않는 회사가 대다수였다. 원서를 받으러 갔던 회사에서 같이 간 남자 선배만 받고 나는 빈 손으로 돌아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자를 받아주는 기업을 찾아 다행히 취업했지만 회사에서 나는 그냥 직원이 아니라 ‘여직원’이었다. 군필 남자 동기들보다 월급이 적은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심한 것은 여직원은 결혼하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사규였다. 비정규직이 되었다가 임신하면 그만두어야 했다.

87년 봄에는 넥타이 부대까지 직선제 개헌을 외치며 거리로 나갔다. 신입사원이던 나와 동기들은 회사를 퇴근한 뒤에는 종로나 명동으로 출근했다. 사회 전반에 넘치던 민주화의 열망에 힘입어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광고회사 최초의 노조가 탄생했다. 사원들끼리 연통해서 노조 창립총회를 열었고 다음 날 종로구청에 노조설립 신고서를 접수했다. 관리부서에서는 접수를 막으려고 했다. 막고 막히지 않으려는 노사간 구청 앞 실랑이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 때 설립된 노조 덕분에 여직원 차별조항이 사규에서 삭제되었고 나는 결혼과 출산 뒤에도 정규직 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명문 규정이 없다고 해서 모든 차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비정규직이 될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헤아려 보니 몇 년의 경력단절 시기를 빼더라도 근로자로 살았던 날이 20년을 훌쩍 넘는다. 돌아보면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늘 부족했다. 야근할 때는 집에 홀로 있는 아이들 때문에 안절부절 했고, 퇴근 후에는 기진맥진해서 놀아달라고 달려드는 아이를 뿌리치기도 했다. 나의 근로자 생활은 여자라서 엄마라서 주부라서 훨씬 더 힘들었다.

Song) 나 스무 살 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 때면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꿈꾸게 했지

사실은 한 번도 미친 듯 그렇게

달려든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봤지, 일으켜 세웠지 내 자신을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말하는 대로…

남1) 함께할수록 더 아름다운 순간이 있습니다.

남2) 5월 9일 꼭 함께해주세요

19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만든 TVCM의 카피이다. 가수 이적이 만든 노래를 그대로 CM송으로 사용했다.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 ‘내일 뭐하지’ ‘미친 듯 그렇게 달려든 적이 없었다’로 이어지는 가사가 마치 애면글면했던 내 스물과 서른의 얘기를 하는 것 같다.

내가 근로자로 사는 동안 대통령이 여섯 번 바뀌었다. 선거 때마다 간절한 소망을 투표지에 담았지만 결과는 대부분 기대 이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면 다시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한다. 근로자인 나는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할까.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에 시달리는 여자인 나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대통령은 누구일까.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더 많은 날을 근로자로 살아야 할 내 아이들에게는 어떤 대통령이 필요할까. 지금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대로’ 당선 후에 실천할 후보는 누구일까.

근로자의 날인 오늘, 나는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투표할 대통령 후보를 고르려고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대 대통령선거 TVCM 스토리보드(2017. 4월 온에어)

https://www.adic.or.kr/ad/tv/show.cjsp?ukey=160928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대 대통령선거 TVCM 유튜브 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