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일까, 개봉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일까. 지난달 31일 오후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의 얼굴은 딱딱했다. 과로와 과민에 시달린 인상이었다. 인터뷰 초반 단조롭던 어조는 말미에야 활기를 띠었다. 영화 만들기와 보여주기의 고단함이 전해졌다.
지난달 열린 제69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돼 화제를 모았던 박 감독의 10번째 장편영화 ‘아가씨’가 1일 개봉했다.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밑그림으로 삼은 ‘아가씨’는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네 남녀의 음모와 사랑과 욕망을 풀어낸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게 된 미모의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히데코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변태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 백작(하정우), 백작의 계략에 동원됐다가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는 하녀 숙희(김태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유쾌하면서도 관능적이다. 박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도 여전하다. 국내 상업영화 최초로 동성애를 상세히 묘사했다는 자극적 표현만으로 단순 평가할 작품은 아니다. 가부장제의 억압적 체계에 반기를 든 두 여자 주인공을 통해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남근주의를 경쾌한 화법으로 비판한다. 박 감독에게 ‘아가씨’ 연출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민희 하정우 조진웅 등 처음으로 함께한 배우들이 많다.
“조진웅은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워낙 놀랐고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민식씨와 같이 맞닥뜨리는 장면이 많아 최씨에게 내가 물어봤더니 칭찬에 그렇게 후한 사람이 아닌데 이례적으로 높은 평가를 했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찍어뒀다.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모셔야겠다, 생각했다. 하정우의 경우 '멋진 하루'를 워낙 재미있게 봤다. 영화도 재미있었고 특히 하정우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하정우가 형상화 해낸 캐릭터가 현실성이 있었다. 한심하기도 하면서 호감이 가기도 했다. 한국 영화사에 독보적인 남성 캐릭터였다. 백작과 코우즈키는 참 나쁘고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코우즈키는 변태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 캐릭터들이 너무 단순한 상투적인 악당이 되지 않게 하려면 조진웅이나 하정우 같이 매력을 가진 사람이 해야 했다. 김민희는 ‘화차’를 보고 마음이 갔다. 처음부터 잘하는 배우였으면 별로 마음이 안 당겼을지도 모른다. (배우로서)놀라운 도약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고 더 관심이 가졌다. 히데코는 연약하고 세상물정 모르고 보호해주고 싶은 사람이나 잔인하다 싶은 면을 지녔다. 이런 점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민희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예전 작품들에 비해 영화가 순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 묘사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보기 나름이다. 히데코가 백작을 유혹한 뒤 곤경에 처하게 하는 장면이 나는 상당히 잔인하게 느껴졌다. 코우즈키가 자신의 아내(문소리)와 어린 조카딸인 히데코의 얼굴을 손에 쥐고 흔드는 장면은 내가 만든 영화의 그 어떤 장면 못지않게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그 장면 찍을 때 내가 시켜놓고도 불쾌하고 굴욕감이 들었다. 몸을 다치게 하거나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쥐고 흔드는 거뿐인 데도 당한 사람은 정말 기분 나쁠 장면이다. 피를 보지도 않는데 상대방에게 굉장히 모욕을 안겨주는 좋은 장면이라 생각하면서도 볼 때마다 나도 힘들다. 손가락을 자른다던가 드릴로 (몸에)구멍을 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장면이다.”
-어둡게 끝맺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명확한 해피엔딩이다.
“보기에 따라 다르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도 해피엔딩이었다. '박쥐'도 ‘올드보이’도 ‘친절한 금자씨’도 그렇다. 해피엔딩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긴 하다. 양면적이지 않고 아주 분명한 해피엔딩이라는 점에서야 물론 독특하긴 하다. 히데코가 그런 행복한 결말을 맞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코우즈키로부터)너무 학대당해왔다. 어린 시절부터 당해왔고 자기 선택에 의해 죄과를 받아야 할 사람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불쌍한 사람이라서 아주 명쾌한 해피엔딩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결말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히데코가 해피엔딩을 맞으려면 숙희도 덩달아 행복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아가씨’는 남근주의를 유쾌하게 비판한 영화다.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동년배 386세대와는 인식이 다르다.
“글쎄. 386세대의 많은 사람을 다 같은 부류로 몰 수는 없지 않나. 나는 대학생 때도 그렇게 잘 (또래 문화에) 적응한 사람은 아니었다. 데모하러 나가서 돌도 던져봤지만 (운동권)조직에 몸 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386 세대에 속해있는지 의문을 지닐 때도 많았다. 내가 가부장적이지 않은 것은, 집안 분위기가 그랬고, 아버지도 별로 권위적이지 않으셔서 그런 듯하다.”
-여성혐오(여혐)가 논란이 되는 시기에 여성을 앞세운 영화로 돌아왔다. 여혐 현상을 어떻게 보나?
“아휴 참, 정말 한심한 거다.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 살면서 느끼는 공포, 억울함은 그냥 현실이다. 막연히 '나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뭐 그런다더라'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다르게 말할 근거가 뭐가 있나. 현실이 그렇다고 하면 (남자들이)잘못을 바로잡을 생각을 해야 한다. 반성도 하고.”
-책에 집착하는 코우즈키가 박 감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감독들 모여서 술 마시는데 임필성 감독(‘남극일기’와 ‘헨젤과 그레텔’)이 대놓고 삿대질을 해가면서 코우즈키가 나라고, 나보고 자꾸 변태라고 말했다. 코우즈키가 예술가나 스토리텔러, 감독 같은 면이 있긴 하다. 그는 (히데코에게 외설스런 책을 읽도록 하고)공연을 연출한다. 그리고 관찰한다. 자기는 더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늙은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하는 상상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것을 오락거리로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감독들이나 창작자들은 아마도 무언가를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가지고 이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떻게 해석하고 무슨 상상을 할까 궁금해 한다. 책을 좋아하는 점이 나랑 닮았다고 하나 일반적인 창작자나 독서가들의 속성이다. 코우즈키가 딱 집어서 나는 아닌 거 같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애초엔 원작처럼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BBC에서 드라마로 이미 만든 사실을 알고선 약간 김이 샜다. 나중에 드라마를 구해서 보니 영국 배경으로 못 만들 이유는 또 없었다. 아주 다른 성격의 작품이었으니까. 그런데 (‘아가씨’의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가 일본제국주의 시대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제작 초기 영화 배경은 일본이었고, 코우즈키는 원래 일본인이었다. 백작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대한 제국 황실의 일가붙이 행세를 하는 머슴의 자식으로 설정했다. 한국 관객들에게 생각거리를 주는 풍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코우즈키를 친일파 조선인으로 바꿨다. 제국주의를 진심 숭배해서 일본 사람이 되고 싶은 진성 친일파를 (내가)한 번 보고 싶었다.”
-원래 계획대로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했으면 배우도, 제작사도 달라졌을 텐데.
“(캐스팅을 감안할 만한)단계까지도 못 갔다. (어느 배우를 캐스팅할지)전혀 생각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할만 했을까… 어맨다 사이프리드? 세어셔 로넌? 제작은 영국이나 미국과 합작을 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제작하는 플랜비나, 영국 워킹타이틀 같은 회사와 함께 만들지 않았을까.”
-'박쥐'와 ‘스토커’처럼 ‘아가씨’도 신발을 상징적으로 활용한다.
“(시나리오 작가)정서경과 각본 작업을 하다 보니 그런 듯하다. 서경은 ‘스토커’에 크레딧이 없으나 각본에 기여를 좀 했다. 신발은 단순하고 딱 떨어지는 조그마한 물건이라서 옷처럼 거추장스럽지가 않다. 그래서 무언가를 경제적으로 표현하기에 좋은 거 같다. 신체가 쓱 들어가고 꽉 잡아주는 그런 이미지도 좋다. 신발은 성장하면서 바뀐다. 그런 면도 중요하다. 계속 바꿔 신어야 하니까.”
-‘아가씨’의 영화화에 부인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고 하던데.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화를 권한 사람은 임승용 대표의 부인이었다. 내가 책을 받아 읽고 아내가 읽은 뒤 이 작품을 하기로 결정했다. ‘스토커’ 다음 작품으로 (할리우드에서)서부극(‘브리건트 오브 래틀보그’)을 찍기로 해서 미뤄둔 영화였다. 서부극 촬영이 무산된 뒤 미국에서 뭘 할까 생각하는데 아내가 ‘핑거스미스’를 하라고 했다. 그 때는 한국영화를 만들 생각까지는 못했다.”
-영화 ‘대배우’에서 깐느박(칸영화제와 박찬욱의 합성어)이라는 인물로 묘사된다.
“깐느박은 류승완(감독)이 만든 호칭이다. 그냥 창피하다. 남이 부르는 걸 내가 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으니까 그냥 둘 수 밖에. 호칭이라는 게 웃자고 만든 것인데 그렇게 불린다고 진짜 칸에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진 않는다.”
-‘대배우’에서 깐느박을 연기한 이경영과 인연이 오래 됐다고 들었다.
“(두 번째 장편영화) ‘삼인조’에 출연했을 뿐 아니라 내가 연출부 생활을 했던 두 작품에 다 출연한 분이다. 내 20대 시절부터 둘이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다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계획은 있나.
“투자확정까지는 아니지만 몇 편 계획이 있다. ‘스토커’ 전에 준비하던 '엑스'라는 영화가 가장 먼저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딸이 ‘아가씨’ 미술팀 스태프로 일했다고 들었다.
“미술팀 막내라서 바닥걸레질 같은 허드렛일만 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감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싫으니까 촬영장에서 눈만 마주쳐도 질색을 하며 '꺼지라'는 의사를 눈빛으로 보내곤 했다(웃음). 촬영장에선 말 한번 못 붙여 봤다. 남보다도 더 못했다. 아무리 미술팀 막내라도 촬영 몇 번하면 친해져서 ‘야 밥 먹었냐?’라고 물을 텐데 그러지조차 못했다. 젊은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라서 각본 단계부터 딸의 의견과 조언을 들었고 많은 도움이 됐다. 영화 현장이 힘들어서 영화 일은 안 하겠다고 한다.”
-제자인 류승완 감독이 지난해 '베테랑'으로 1,000만 관객을 넘겼을 때 감회가 남달랐을 듯하다.
“대견하고 부럽다. 더군다나 (신작)‘군함도’에 송중기를 캐스팅했는데 송중기가 또 그 사이 엄청난 스타가 됐다. 치고 올라가는 기세가 부럽다. 대성공을 거둘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성공은 정말 축하해줄 일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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