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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잘못됐을 때 멈출 수 있는 용기

입력
2016.03.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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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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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한없이 부끄럽다.

10년 전으로 기억한다. 혈기 넘치던 사건기자 시절 하이에나처럼 경찰서 주변을 돌아다니다 월척을 하나 건졌다. 연말에 서울시내 경찰서에서 국내 5위 안에 드는 다단계회사를 수사하고 있다는 내용이 취재됐다. 당시 제이유네트워크 주수도 회장 비리 여파로 다단계회사의 불법행위와 서민들의 피해는 사회적 관심사였다. 문제는 비리내용은 파악됐지만 수사대상 기업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취재를 거듭해 후보가 A와 B 두 곳으로 압축됐다. 사실관계 확인을 거부하는 수사팀 관계자를 어렵게 만나 한 가지만 확인해 달라고 졸랐다. ‘A기업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부인하지 않았다. 성탄절 아침에 ‘단독’이란 타이틀로 보고한 뒤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회면 톱기사로 지면에 잡혔지만 기사를 쓸수록 흥분보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수사팀 관계자의 얼굴에서 수사내용을 잘 모르고 대답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차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화했지만 그는 등산 중이라 받지 않았다. 오보의 가능성을 안고 다음날 아침 A기업의 실명이 박혀 기사가 나갔다. 걱정했던 대로 오보였다. 수사대상은 B기업이었다. 수사팀 관계자에게 항의하자 “A기업으로 알고 있었다”며 다소 황당한 답변을 했지만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A기업 다단계회원들로부터 수백 통의 항의전화를 받았다. 정정보도를 내고 사표를 냈지만 회사의 배려로 지금껏 기자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도 후회되는 건 오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회사에서 욕을 먹더라도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점이다. 내 기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던가.

부끄러운 과거를 꺼낸 이유는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중간에 다른 길이 보여도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이는 실패한 경험이 별로 없고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집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4,5년 전 저축은행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는 최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검찰은 금융당국 전ㆍ현직 인사들과 정치인들을 금품수수 혐의로 무더기로 재판에 넘겼다. 곪아터진 저축은행 비리와 서민들의 피해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검찰은 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수사에 매진할 수 있었다. 특히 큰 그림을 그리고 접근하던 사안이라면 다소 무리한 수사를 해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일부 수사대상자의 경우 검찰이 애초에 의심했던 범죄사실이 드러나지 않거나 곁가지만 나왔다. 그러나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일이 너무 커져 검찰은 ‘타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혐의가 나올 때까지 별건 수사나 먼지떨이 수사에 들어갔다. 단순히 골프나 술 접대 받은 사실을 과대 포장해 기소하기도 했다. 결과는 무죄였지만 법정에 섰던 사람들은 수년 동안 인생을 망쳐버렸다. “계획과 달리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멈춰야 하잖아요. 당연한 얘기지만 브레이크 걸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나마 그런 용기 있는 검사도 별로 없습니다. 그걸 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다. 법원에서 법률적 판단을 받아보기 위해 기소한다는 검사들이 종종 있다. 유죄를 받아낼 확신은 없지만 수사한 노력이 아까워서 재판에 넘기는 경우도 있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혐의를 부풀려 기소하기도 한다. 이것만큼 위험천만한 발상이 없다. 봐주기 수사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담보로 ‘법적 실험’을 자행하거나 검찰권을 남용하는 일은 더욱 지양해야 한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 멈출 줄 아는 용기는 기자나 검사보다 정치인에게 더 필요한 덕목일 지도 모른다.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활동하다 보면 입법이나 의견표명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정치인의 수사에는 필요에 따라 과거의 발언마저 부정하는 변명과 궤변이 넘쳐난다. 정치적 철학과 소신은 중요한 가치지만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는 용기와 결합돼야 더욱 빛이 나지 않을까.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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