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잊혀지는 것은 축구 선수만이 아니다. 다른 종목 선수와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팬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으며 스타 대접을 받지만 조금이라도 하향세를 보이면 그날로 찬밥 신세가 된다.198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린 권투 선수 중에 김태식(金泰式ㆍ44)이라는 ‘작은 거인’이 있었다. 160㎝ 작은 키에 무쇠 주먹을 휘두르며 한때 전국 권투 팬을 들뜨게 했던 주인공이다.
80년 2월 파나마의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루이스 이바라를 2회 1분 11초 만에 링에 눕히고 챔피언에 오른 그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김태식 이야기를 불쑥 꺼내는 까닭은 김 선수야말로 스타가 얼마나 쉽게 팬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는 강원 묵호 출신으로 나와 동향인데다 나 역시 권투를 좋아했기 때문에 세계챔피언이 되기 전부터 친하게 지냈다.
2차 방어전에서 무릎을 꿇은 뒤 재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서울 압구정동 내 아파트에 찾아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81년 8월 30일 마침내 김태식의 재기전이 열렸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안토니오 아벨라와의 타이틀매치였다. 나는 링 앞에 자리를 잡고 숨을 죽이며 관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김태식의 무참한 패배였다.
2회 2분 46초 만에 KO패를 당한 것이다. 상체가 거의 링 밖으로 나온 채 코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처참한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울분, 동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러나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관중들의 반응이었다. 그날 링 위에 오를 때만 해도 환호하던 관중이 어느새 싸늘한 구경꾼으로 바뀐 것이었다. 3분여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김태식은 아벨라 뿐만 아니라 관중들로부터도 참패를 당했다. 이후 그는 끝내 재기하지 못했고 지금은 경기 부천시에서 중국 농산물 수입판매업을 하며 조용히 살아간다고 한다.
가수 하청일(河淸一)씨도 버림받은 스타 중의 한 명이다. 며칠 전 병실로 후배 코미디언 이봉원(李俸源) 박미선(朴美善) 부부가 찾아왔는데 그들이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한때 서수남(徐守男)씨와 콤비를 이루며 큰 인기를 끌었던 하청일이 지금은 미국 LA에서 화장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스타는 정말 한 순간의 지위에 불과한 것일까.
나 자신도 스타의 비애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최근에도 아주 쓰라린 경험을 했다. 얼마 전 병실로 한 아가씨가 찾아왔다. 생면부지인 그녀가 다짜고짜 “선생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종교단체에서 보낸 사람인 줄 알고 “용건만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병실바닥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사업을 하다 완전히 망했어요. 제발 돈 좀 빌려주세요.” 이런 내용이었다. ‘오죽했으면 병실로 찾아왔을까’ 하는 불쌍한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불쾌했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환자에게 어떻게 돈 꿔달라는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편지로 자신의 어려운 사연을 들려주며 도움을 호소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찾아와 돈 얘기를 꺼내는 것은 나를 이용하려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스타의 비애라면 비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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