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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흔적서 위로 받다…힐링의 섬 소록도

입력
2017.03.1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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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슬픔, 저주.... 이런 이미지 때문에 소록도는 가보고 싶지만 왠지 꺼려지는 곳이다. “좋은 경치를 보는 감동은 며칠이면 끝나지만, 사람에게 감동을 받으면 인생이 바뀌죠. 절망의 땅 소록도는 그래서 아름다운 곳입니다. 천형을 이겨낸 환자들, 그들과 함께한 사람들로 인해 소록도는 감동의 땅이자 힐링의 섬입니다.”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는 오스트리아 태생 두 간호사 이야기로 소록도를 소개했다.

녹동항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소록도성당. 고흥=최흥수기자
녹동항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소록도성당. 고흥=최흥수기자
소록도의 천사 혹은 영웅, 마리안느(안경)과 마가렛.
소록도의 천사 혹은 영웅, 마리안느(안경)과 마가렛.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40여년 동안 거주했던 숙소.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40여년 동안 거주했던 숙소.
두 사람이 머무는 동안 사용한 오븐.
두 사람이 머무는 동안 사용한 오븐.
별다른 장식 없는 소박한 침실.
별다른 장식 없는 소박한 침실.

소록도에서 각각 43년과 39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마리안느(83)와 마가렛(82)은 김 신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나이팅게일과 슈바이처는 쨉도 되지 않는” 위인이다. 1960년대까지 한센병 환자를 대하는 한국 의료진은 멀찍이 떨어져서 증상을 물어보고, 처치도 스스로 하도록 지시했다. 두 사람은 달랐다. 아침마다 숟가락을 쥘 수 없는 환자에게 밥을 떠먹이고, 환자와 마주앉아 환부를 무릎에 얹어 냄새를 맡고, 맨손으로 짓무른 상처에 약을 발랐다. 때로는 환자들을 숙소로 초대해 함께 식사도 했다. 한센인 거주지역과 의료ㆍ종교인 거주지역이 철조망으로 분리돼 있을 때였다.

한국을 떠나는 과정도 아름다웠다. 소록도 주민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섬을 나간 후 편지를 한 통 보냈는데, 혹시라도 미리 알려질까 봐 녹동이 아니라 광주에서 부쳤다. ‘우리는 43년 동안 여러분과 재미있게 생활했고, 베풀어준 사랑에 감사를 느낀다. 이제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부담이 되기 싫어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마리안느는 당시 대장암 투병 중이었다. 평소 두 사람을 수녀님으로 불렀던 주민들은 그들이 당연히 고국의 수녀원에서 편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수녀가 아니라 간호사였다. 소록도에서 근무하면서 어떤 보상도 받지 않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지급하는 최저 연금이 전부였다. 마리안느와 치매를 앓고 있는 마가렛은 현재 인스부르크의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김 신부는 또 “두 분은 바퀴벌레와 기자를 가장 무서워했다”며, 언론사에서 취재를 온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자취를 감췄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기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광주대교구가 고흥군의 지원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소록도의 두 천사를 그린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다음달 개봉한다.

일제강점기 한센인 인권유린의 상징물이 된 감금실.
일제강점기 한센인 인권유린의 상징물이 된 감금실.
소록도 100년의 아픈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소록도 자료관.
소록도 100년의 아픈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소록도 자료관.
수탄장에서 소록도 병원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 뒤로 녹동항에서 연결되는 소록도대교가 보인다.
수탄장에서 소록도 병원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 뒤로 녹동항에서 연결되는 소록도대교가 보인다.
녹동항에서 본 소록도대교 일몰.
녹동항에서 본 소록도대교 일몰.

아기 사슴을 닮은 소록도는 해안선 14km, 여의도 1.5배 정도의 작은 섬이다. 2009년 소록대교로 연결하기 전까지, 고흥반도 끝자락 녹동항과 채 1km가 못 되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100년 가까이 한센인들을 강제로 격리 수용한 딴 세상이었다. 지금의 소록도는 울창한 송림과 깨끗한 백사장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환자들이 손수 가꾼 중앙공원도 볼거리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개방하고, 주차장에 차를 댄 후 걸어서만 둘러 볼 수 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왼쪽은 국립소록도병원과 중앙공원, 오른쪽은 소록도 해수욕장과 소록도성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이 거주했던 ‘직원지대’와 한센인이 거주했던 ‘병사(病舍)지대’ 두 구역은 1960년대까지 철조망으로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병사지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감염을 우려해 직원지대의 미감(未感)시설로 옮겼는데,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서로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주차장에서 병원으로 이동하는 초입 솔숲이 아름다운 이곳은 그래서 탄식의 장소, ‘수탄장(愁嘆場)’으로 부른다.

수탄장에서 국립소록도병원까지 500m 해안산책로는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병원 뒤 감금실과 검시실은 관람객을 숙연하게 한다. 일제의 인권탄압 상징물인 감금실은 일본인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감금과 체벌이 횡행하던 곳으로, 요양소 운영방식에 저항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목적으로 이용됐다. 환자들은 사후에도 검시의 수난을 당했다. 이 때문에 소록도 한센인들은 발병과 함께 가족과 생이별, 해부, 화장이라는 ‘3번의 죽음’을 당했다고 말한다.

뒤편의 중앙공원 역시 1940년 환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완공했다. 완도와 득량도에서 운반한 기암괴석과 일본과 대만에서 들여와 심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아픈 역사의 증거물들이다.

주차장 오른편 직원지대 끝자락에는 소록도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소록대교 너머 녹동항이 바라보이는 언덕이다. 야외 정원과 십자가의 길 등이 꾸며진 이곳에서는 가족, 개인, 단체의 피정이 가능하다. 피정은 성당과 수도원에서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천주교 의식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거처하던 집은 주차장에서 성당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다. 2005년 그들이 돌아간 후 폐허처럼 방치된 것을 광주대교구에서 관리권을 넘겨받아 정비했다. 별다른 장식 없는 소박한 침실과 거실도 그렇고, 부엌 한 켠에 40여 년 손때 묻은 낡은 오븐이 이들의 검소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마다의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사는 방문객들도 소록도의 아픔과 치유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큰 위로를 얻는다. 한번쯤은 소록도를 가야 하는 이유다.

고흥=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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