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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 죽을 날만…" 가습기 3ㆍ4단계 피해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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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 죽을 날만…" 가습기 3ㆍ4단계 피해자의 '눈물'

입력
2016.05.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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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가능성 낮다” 정부ㆍ기업 지원 제외

수천만원 치료비에 전재산 날리기도

‘가짜 피해자’ 사회 편견에 고통의 나날

3·4단계 판정을 받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한국일보사에서 피해보상 대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재훈 인턴기자(세종대 광전자공학과 4)
3·4단계 판정을 받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18일 오후 서울 한국일보사에서 피해보상 대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재훈 인턴기자(세종대 광전자공학과 4)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현수(71ㆍ가명)씨는 밤이 두렵다. 잠들면 내일 다시 눈을 뜰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다. 유씨에게는 몇 년 전부터 “순간적으로 세상이 고요해지며” 심장박동이 멈추는 심정지 증상이 종종 나타난다. 때문에 그는 호출버튼만 누르면 119 구급대가 즉시 집에 올 수 있도록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 몇십 미터만 걸어도 호흡이 가빠져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하다. 그는 매일 “오늘도 살아 남았다”는 심정이다.

유씨는 서울에 있는 큰 종합병원을 모조리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상세불명(원인불명)의 호흡기질환’이나 ‘만성 기관지염(폐색성 폐질환)’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뚜렷한 치료법도 없다고 했다. 이런 증상들은 유씨가 2004년부터 6년 가까이 옥시싹싹뉴가습기당번을 사용면서부터 나타났다. 2011년 정부에 의해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밝혀진 뒤 조씨는 2013~14년 정부의 1차 피해 조사에 접수했지만 인과관계 판정에서 4단계(가능성 없음)로 분류됐다. 유씨는 22일 “아무리 아파도 폐 섬유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도 전혀 못 받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실상이 속속 드러나 이목을 끌고 있지만 정부 조사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가능성이 낮거나 없다고 판정된 3, 4단계 피해자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살균제를 쓰고 나서부터 이런 저런 질환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부의 의료비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생활고를 겪으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들도 3, 4단계 피해자들은 아예 배상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비염이나 천식 등 증상이 가벼운 경우엔 ‘가짜 피해자’라는 편견 어린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유씨는 2005년부터 10년 가까이 병원을 들락거리며 진료비며 약값에 거의 전 재산을 썼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는 한 달 병원비가 70만~80만원씩 들기도 했다. 생활고에 최근엔 병원 가는 것을 1주일에 한 번만 가는 것으로 줄였다. 옥시 제품을 2000년부터 5년간 사용하다 간질성 폐질환을 앓게 된 조모(58)씨도 수술비와 약값으로 수천만원을 쏟아부었지만 4단계 판정을 받은 탓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그는 “정부도 기업도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며 “여윳돈이 없는데 최근에는 온 몸이 가려운 피부병도 생겨 막막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정부는 뒤늦게 이들에 대한 구제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가습기 살균제 조사 판정위원회 아래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폐이외질환 검토 소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들의 과거 의료기록을 분석하고, 독성물질에 대한 역학조사를 추가로 실시해 피해판정 범위를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1년 이후 5년이나 줄곧 폐 섬유화 이외의 질환에 대한 조사와 구제를 요구해왔던 3, 4단계 피해자들은 이제서야 뒤늦은 대책을 내놓은 정부에 불만을 토로했다. 유씨는 “정부가 지금까지 무시하다 5년이 지나서야 계획을 발표하는 데 그쳤다”며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조씨도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우선 구하고 보는 게 상식인데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 피해자를 지원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법인 창립총회에서 참석자들이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제정과 청문회 도입을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배우한 기자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법인 창립총회에서 참석자들이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제정과 청문회 도입을 주장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배우한 기자

간질성 폐질환부터 비염, 피부염 등 다양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이들이 3, 4단계 판정을 받아 구제 대상에서 배제된 것은 옥시 제품 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흡입했을 때 주로 나타나는 폐 섬유화 증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경 등의 제품 성분인 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CMIT)ㆍ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은 2012년 질병관리본부(질본)의 동물실험에서 폐 손상이 확인되지 않았고, 실제로 이들 제품 사용자들은 폐 섬유화가 아닌 다른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질본의 동물실험에서 유해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사실 자체가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 피해자들 입장에선 억울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민주(40ㆍ가명)씨는 2009년부터 1년 가까이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했다가 천식을 얻었다. 평소에는 잔기침을 많이 하는 수준이지만, 심할 때는 호흡이 어려워 집 근처 약국을 찾아가 무작정 ‘살려달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이씨도 정부 1차 조사 때 4단계 판정을 받았다. 정부로부터 받은 두 장짜리 조사결과안내서에는 ‘판독 결과 귀하의 질병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기관지 부위 중심의 폐질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딱딱한 문장 몇 줄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2차 조사 때 재심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씨는 “생전 기침 한 번 안 하던 사람이 왜 가습기 살균제 사용시점에서 천식이 생겼는지 설명은 전혀 없고, 환경부에 따져봐도 ‘전문가 판단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2000년 초부터 10년간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쓰고 비염과 폐렴 등을 달고 산 곽미숙(60ㆍ가명)씨는 정부 3차 피해 접수를 신청했지만 피해자로 인정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곽씨는 “지금까지 CMITㆍMIT 성분에 대한 (1, 2단계) 피해 인정 사례가 거의 없어 기대를 접었다”며 “남편과 아들은 시간 낭비라며 접수조차 안 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공식 피해 인정을 하지 않은 탓에 3, 4단계 피해자들은 정부의 의료비 지원은 물론, 업체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검찰 수사 역시 1, 2단계 피해를 유발한 업체만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씨는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들은 우리와 협상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검찰의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도 1, 2단계 피해자들과는 매주 만나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면담을 요청했을 때는 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옥시 제품에 대한 동물실험에서 ‘간 위장 등 다른 장기 손상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결과도 있었던 만큼 살균제 성분 전체의 유해성 여부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화학회사 다우케미칼이 지난해 낸 상품안전평가서에는 CMIT와 MIT 성분을 공기 중 흡입할 경우 기관지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고 많은 양을 섭취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즉 문제의 살균제 성분들이 흡입했을 경우 인체에 어떤 해를 미치는지는 계속 연구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심층 연구에서 새로운 결과가 나오면 현재의 판정등급이 바뀔 수 있지만 정부가 처음부터 폐 섬유화만을 근거로 피해 계급 나누기에 급급했다는 비판이다. 이씨는 “1, 2단계만 피해자고, 우리는 ‘가짜 피해자’라는 사회적 시선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조씨도 “살인 제품을 허가해 준 정부가 사과는 못할 망정 피해자를 두고 가축처럼 등급 매긴 일은 씻을 수 없는 상처”라고 말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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