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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를 성직자로 이끈 것은 천둥 번개였다

입력
2017.03.1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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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수도승으로 살았던 시절의 젊은 루터 초상화. 신앙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얼굴이다. 오른쪽은 영면한 루터. 독일 르네상스 대표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가 각각 그렸다.
왼쪽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수도승으로 살았던 시절의 젊은 루터 초상화. 신앙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얼굴이다. 오른쪽은 영면한 루터. 독일 르네상스 대표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가 각각 그렸다.

루터는 마지막 중세인이자 뼛속까지 중세인이었다. 그는 철저히 중세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살아갔으며 구원을 추구했다. 바로 이 중세적인, 너무나도 중세적인 루터에 의해서 근대적 신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약 루터가 중세적 신앙의 본질과 형식 및 방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지배할 수 없었다면, 중세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 어렵고도 긴 투쟁을 그토록 탁월하게 이끌 수 없었을 것이다. 중세의 극복은 다름 아닌 중세의 토양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중세성은 수도원 생활과 더불어 더욱 더 강화되었다.

루터는 1483년 만스펠트 방백국(方伯國)에 속하는 도시 아이슬레벤에서 구리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491년부터 1497년까지 만스펠트에서 시립 라틴어 학교에 다녔고 1498년까지 막데부르크에서 성당학교에, 그리고 1501년까지 아이제나흐에서 사제학교에 다녔다. 이어 1501년 초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중세 대학의 관례대로 일단 인문학부에서 공부했다. 인문학부란 나중에 신학이나 법학 또는 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교양을 배우는 과정으로서 후일 철학부로 바뀐다.

중세 대학의 인문학부는 문법, 수사, 논리, 산술, 기하, 음악, 천문의 일곱 분야를 가르치지만 철저히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인문학부의 교수들은 신학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신학교육을 받은 학자들이었다. 중세 대학은 성직자의 공화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성직자의 공화국에서 루터는 무엇보다도 스콜라 신학과 그 토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웠다. 그리고 줄곧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이 엄격한 생활 공동체 역시 철저하게 기독교적 경건에 의해 지배되었다.

루터는 1505년 1월에 석사학위와 더불어 에르푸르트 대학의 인문학부를 마친 후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해 여름방학을 맞아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중 7월 2일 에르푸르트 근교에서 천둥번개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때 그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이며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를 부르며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7일에 수련사의 자격으로 에르푸르트 소재의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여 1507년 2월 27일에 부제로 그리고 같은 해 4월 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런데 루터가 수도사가 된 사건을 단순히 그가 체험한 극적인 죽음의 공포와 그로 인한 성 안나에 대한 서원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와 더불어 당시의 신학과 신앙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루터가 수도사가 된 사건은 개인의 심리학적-실존적 차원인 동시에 중세 말의 사회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수도사가 되고자 결정하기 이전부터 이미 다양한 체험을 통해 영적 시련을 겪었는데, 이 시련은 그의 개인적 성향에 의해서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종말론적 신앙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중세 말엽에는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기대했다. 이러한 중세 말의 종교적 콘텍스트에 의해 조건 지어진 루터의 영적 시련에 천둥번개에 의한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라는 영적 시련이 더해졌던 것이다. 물론 후자는 루터가 느꼈던 영적 시련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렬한 것으로서 수도사가 되겠다는 그의 서원을 촉발시킨 도화선이자 기폭제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중세에는 구원에 도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했다. 수도원에서 경건하고 금욕적인 고행을 하는 것이 그 한 방법이었으며 일상적인 삶에서 선행을 베푸는 것이 또 다른 방법이었다. 루터는 전자를 선택했다. 수도사에게는 세 가지 서원, 즉 청빈과 복종 및 정결이 요구되었다. 수도사는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며 예배, 기도, 명상에 정진하고 고행을 감내해야 했다. 루터는 이 모든 중세적 구원의 방법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종교개혁을 감행할 때에도 루터는 여전히 신부의 신분이었다. 그가 수도복을 벗은 것은 종교개혁이 발발하고 나서 7년이 지난 1524년 10월이다. 그리고 1525년 6월에는 수녀원을 탈출한 전직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와 결혼했다. 신학적인 중세적 구원의 원리가 근대의 중요한 지표들 가운데 하나인 세속성, 즉 결혼, 가족, 직업 등에 의해 대체된다.

루터는 1507년부터 수도원장의 지시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508년 가을 역시 수도원장의 지시대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도덕철학을 강의하기 위해 그곳에 소재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으로 옮겼다. 1509년 3월에 ‘성서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그 해 가을에는 ‘명제집 주석 학사’ 학위(명제집 주석이란 오늘날 체제와 비교하자면 조직신학이나 교의학에 해당한다)를 취득했으며, 그 직후 다시 에르푸르트 수도원으로 돌아가 명제집을 강의하기 시작했으며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로마를 여행했으며 1511년 9월에 완전히 비텐베르크로 옮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의 부원장이 된 동시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해 1512년 10월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성서를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꼭 5년 전의 일이었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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