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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주에서 만난 ‘그때’의 진짜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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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주에서 만난 ‘그때’의 진짜 택시운전사

입력
2017.07.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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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에서 만난 장훈명(왼쪽) 씨와 조성수(오른쪽) 씨. 이들은 실제로 택시를 끌고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나서 시민들을 구했다. 사진=조두현 기자
광주광역시에서 만난 장훈명(왼쪽) 씨와 조성수(오른쪽) 씨. 이들은 실제로 택시를 끌고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나서 시민들을 구했다. 사진=조두현 기자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밥은 안 주고 술만 마시게 한다고. 그도 그런 것이 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렇게 못 합니다. 도저히…”

지난 17일 광주광역시의 한 식당에서 장훈명 씨와 조성수 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택시를 끌고 항쟁에 참여했다. 조성수 씨는 지금도 개인택시를 운행 중이고, 장훈명 씨는 3년 전부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을 찾게 된 계기는 시사회에서 8월 2일 개봉을 앞둔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서 생겼다. 영화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위해 광주로 잠입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광주로 향한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제 이야기를 다뤘다. 극 중 홀로 딸을 키우는 서울의 평범한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은 10만원의 택시비를 벌기 위해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치만)를 태우고 영문도 모른 채 1980년 5월 어느 날 광주로 향한다. 위험하니 서울로 돌아가자는 만섭의 만류에도 피터는 대학생 재식(류준열)과 황태술(유해진)의 도움으로 촬영과 취재를 진행한다. 만섭과 피터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오게 되고,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은 전 세계에 낱낱이 드러났다.

만섭과 피터는 광주에서 서울로 가던 중 검문을 받게 된다. <택시운전사> 중. 사진=쇼박스 제공
만섭과 피터는 광주에서 서울로 가던 중 검문을 받게 된다. <택시운전사> 중. 사진=쇼박스 제공

김만섭의 모델이 된 김사복은 실존 인물이나 행방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영화에선 위르겐과 공항에서 헤어질 때 가짜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준 것으로 표현됐다. 당시 김사복의 나이는 적지 않아 현재 살아있다면 대략 80~90세일 것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로 한국의 민주화에 큰 공을 세운 위르겐 힌츠페터는 지난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지난해 1월 투병 끝에 타계했다.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는 실화라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는 김만섭과 피터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런데 난 광주 토박이 운전사로 등장한 황태술(유해진)에 유독 관심이 갔다. 그는 시위하다 다친 사람들을 택시로 실어 나르던 중 만섭과 피터를 만난다. 만섭의 차가 고장 나자 만섭과 피터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진수성찬을 대접하고 어떤 언론도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에 분개한다. 계엄군의 조준 사격에 택시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부상자를 구하고, 만섭과 피터가 무사히 광주를 탈출할 수 있게끔 헌신하며 돕는다. 비록 영화 속 가상 인물이지만 그가 보여준 행동은 허구라고 볼 수 없다. 당시 광주 택시운전사의 관점과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광주 택시운전사인 황태술(유해진)은 정 많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광주의 상황이 밖으로 알려지도록 만섭과 피터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택시운전사> 중
광주 택시운전사인 황태술(유해진)은 정 많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광주의 상황이 밖으로 알려지도록 만섭과 피터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택시운전사> 중

광주에서 만난 장훈명 씨와 조성수 씨는 영화에서 본 황태술과 비슷했다. 어쩌면 황 기사는 그때의 광주 택시운전사를 응축해놓은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5·18 기념재단이 마련한 <택시운전사> 시사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그들은 37년 전으로 돌아가 그날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Q: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택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장훈명(이하 장): 맞습니다. 영화에서도 보듯이 서울에서 온 택시가 아니었으면 필름이 공개될 수 없었죠.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위는 5월 18일 전에도 꾸준히 있었어요. 그러다가 17일에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18일 광주에 공수부대와 계엄군이 들어왔고, 그러면서 무력시위로 번져갔습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시내버스를 앞세우고 택시들이 행진했죠. 라이트를 켜고 클랙슨을 울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어요. 그대로 도청까지 갔습니다.

Q: 행진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장: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때리고 찌르는 걸 봤어요. 그 사람이 우리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죠. 그러다 5월 19일에 대학생 한 명을 환자로 위장해 화순까지 도피시키게 됐는데, 그때 학생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됐어요. 사실 택시 기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두환이 누군지, 12·12 사건이 뭔지도 잘 몰랐어요. 먹고 사는 게 급하고 하루 20시간 가까이 일할 때였으니까요. 광주로 돌아오자마자 역전으로 가서 기사들을 모았죠. 그때만 해도 차도 택시도 얼마 없어 서로 얼굴을 알고 지냈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가 이대로 있다간 다 죽게 생겼다고 말했어요. 각자 택시를 끌고 모였습니다. 클랙슨과 불빛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죠.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버스와 택시들의 행진 모습. 지금도 매년 5월 20일에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이와 비슷한 행렬 행사를 열고 있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버스와 택시들의 행진 모습. 지금도 매년 5월 20일에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이와 비슷한 행렬 행사를 열고 있다. 사진=5·18 기념재단 제공

Q: 영화를 보면 택시가 총알받이도 하고 마지막엔 추격신도 벌이는 등 희생이 만만치 않습니다.

조성수(이하 조): (웃음) 글쎄요. 그건 좀 미화된 것 같고요. 그런데 실제로 택시가 사람들을 많이 구했습니다. 우린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때는 계엄군이 젊은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때려잡았어요. 대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기 때문이죠. 쫓기는 사람을 태워 도망도 숱하게 다녔습니다.

Q: 그때 혹시 서울에서 내려온 택시운전사와 독일 기자를 본 적이 있나요?

조: 없습니다. 언론 통제가 심할 때라 아마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광주 영상도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TV도 많이 없을 때였습니다.

Q: 영화를 보니까 꽤 위험한 상황이었던데요, 다치진 않았습니까?

장: (웃음) 그때는 몸이 성한 게 비정상이었습니다. 도청 앞에 가니까 이미 거대한 군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갑자기 계엄군이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죠. 우린 택시 안에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창문 올리라고 말하면서 도망갔어요. 순식간에 군인들이 7~8명씩 조를 이뤄 택시에 붙었습니다.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유리창을 깨고 택시 기사들을 끄집어내 무자비하게 때리고 밟고…. 저 역시 곤죽이 되도록 엄청나게 맞았죠. 온몸이 피범벅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28세였습니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으로 차 위를 뛰어다니며 달아났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신발은 벗겨졌고, 옷은 찢겨있고…. 사람들 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병원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전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병원도 부상자들로 아비규환, 아수라장이었어요.

한 시민이 계엄군에게 맞고 있는 모습
한 시민이 계엄군에게 맞고 있는 모습

Q: 군인들의 폭력이 어느 정도로 심했나요?

조: 제가 대인광장에서 본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택시로 향하는 군인들을 붙잡으며 막더라고요. 그러자 군인이 그 아주머니를 찔렀습니다. 그땐 모든 계엄군이 착검 상태였어요. 바로 이어서 택시 안에 있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를 끄집어내 찔렀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꾸라진 그들을 대기하고 있던 픽업트럭에 던져버리더라고요. 마치 짐짝 싣듯이 말입니다. 추측하기로 모자로 보이는 그들은 아마도 택시를 타고 피신하려다 잡힌 게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그때 우린 지식인들이 떠드는 정치니 이념이니 잘 몰랐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어요. 우린 그것에 분개한 겁니다. 당시 군인들이야말로 폭도였어요. 시위 진압이 목적이 아니라 살육과 폭력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밥은 안 주고 술만 마시게 한다고. 그리고 죄다 경상도 출신 군인들만 뽑아서 보냈다고. 그도 그런 것이 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렇게 못 합니다. 도저히…

Q: 군인에게 잡힌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조: 저도 5월 27일에 시위하다 잡혔습니다. 어떤 중령이 저를 잡았었는데 시위를 주모한 사람을 한 명 알려주면 고문 안 하겠다고 말하더군요. 정말 총살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굴비 엮듯이 포박을 당했어요. 한 사람을 발로 차면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픽업트럭에 실려 고개를 푹 숙인 채 31사단 헌병대로 끌려갔죠. 고개를 조금만 들면 바로 군홧발로 머리를 밟혔습니다. 그리고 20일 동안 정신교육을 받고 상무대 영창을 통해 풀려났어요. 그때 군법무관이 그러더군요. “네가 여기서 죽어 나가도 난 11자의 글자를 쓰는 수고밖에 없다.” 아직도 궁금합니다. 그 11자가 무엇인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193명(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부상자는 852명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193명(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부상자는 852명이다

Q: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기대했던 만큼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보나요?

장: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하다 눈물을 흘린 한 유가족을 안아줬을 때 저도 같이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왜 눈물이 났는지는 모르겠어요. 우리가 바란 건 어쩌면 그것 하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Q: 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장: (환하게 웃으며) 리얼하게 잘 만들었네요. 우리의 이야기를 잘 표현했어요. 지금껏 본 5·18 관련 영화나 다큐멘터리 중 최고였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온 광주 시민이 한 식구였어요. 모든 사람이 물 나눠 마시고 주먹밥 나눠 먹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어요. 먹먹해서 한동안 서로 말을 못 했습니다. 좋은 시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광주=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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