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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난민, 우리 안의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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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난민, 우리 안의 난민

입력
2015.09.0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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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파르마대학 생리학연구소의 자코모 리촐라티 교수 연구팀이 1996년 짧은꼬리원숭이 뇌에 전극을 설치하고 실험을 했다. 연구팀은 원숭이가 먹을 것을 집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뇌의 어떤 부분이 활성화되는 지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원숭이에게 사람이 음식을 집어 올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원숭이가 먹을 것을 집을 때 활성화되었던 부분이 똑같이 반응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연구팀은 뇌 신경세포 중 ‘보는 것’을 자신이 ‘하는 것’과 똑같이 받아들이는 ‘거울 뉴런’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타인의 행동을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행동처럼 느끼는 신경세포가 있다는 것이다. TV 화면에서 외줄타기나 번지점프처럼 아슬아슬한 장면을 볼 때 손에 땀을 쥐게 되는 걸 생각하면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후속 연구들에서는 인간의 경우 거울 뉴런이 행동만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마음을 공유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거울 뉴런’이 공감 능력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지난달 하순 레바논 베이루트 시내에서 볼펜 파는 시리아 난민 부녀의 사진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것도 이런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부녀 사진보다 훨씬 강렬한 형태로 시리아 난민의 참상과 고난을 전하는 기사나 사진은 이미 숱하게 많다. 그런데 잠들어 있는 다섯 살 딸을 안고 볼펜 여덟 자루를 내밀며 사달라고 하는 팔레스타인계 시리아 부녀의 사진이 이틀만에 14만달러라는 기부가 답지하는 공감을 얻은 이유는 무얼까.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의 난민촌을 떠나 베이루트에서 피난 생활 하는 부녀의 모습은 극적이랄 건 없다. 하지만 잠 든 아이를 안고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그 장면은 누군가 해 봤거나 본 경험이 있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것을 보는 사람 자신의 처지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감정 이입’ 이 쉬운 사진이었던 것이다.

유럽은 지금 심각한 난민 문제에 직면해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분쟁과 기아를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서유럽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 불법 입국을 막아야 하는 각국의 사정도 있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는 난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인류애와 인도주의 정신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 그리고 한국의 난민 대우와 정책을 되돌아보게 된다.

“인신매매조직이 거대한 무덤으로 바꿔버린 지중해에 유럽이 등을 돌려선 안 된다. 유럽 지도자들은 포퓰리즘과 고립주의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난민을 도와야 한다는 법적, 도덕적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왜 중요한지 자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대규모 수색구조작전 지원 노력을 지중해 국가들뿐 아니라 모든 유럽이 해야 한다. 유럽은 내전 중인 국가들이 그 상황을 극복하도록, 그 나라 국민의 복지가 증진되도록, 경제가 번영하도록 도와야 한다.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유럽연합(EU)은 성실하고 단호한 방식으로, 남쪽 이웃들과 호혜 조약을 체결해 이 문제에 간여해야 한다.

난민들의 요구 뒤에는 인간의 비극이 있다. 폭력, 공포, 상실 같은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유럽에 도달하는 게 아니다. 싸움과 살육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인은 지난 세기 살육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다. 그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난민 위기에 응답해야 한다. EU의 가치가 국경 너머로 퍼져간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한국일보 6월 15일자 세계는 왜 ‘유럽의 난민 기억상실증’▶전문 보기)

“한국의 난민 보호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로 지난 20년간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는 신청자의 6%에 불과하다. 심사 기간도 몇년씩 걸린다. 그동안 난민 신청자들에 대한 생계지원은 전무하다. 그럼에도 취업을 하면 불법이다. 난민 신청자 중 절반 이상이 돈이 없어 식사를 거른 적이 있다고 했다. 단속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벌 수밖에 없다. 그러면 법무부는 기다렸다는 듯 불법 취업 명목으로 잡아들여 추방한다.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그런 짐승 같은 행정 관행의 뒷덜미를 낚아채 주저앉힌 느낌이다. 오랜만에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현장을 목격한 듯하다.

난민 신청자에게 제한 없이 취업 활동을 허가할 경우 난민 신청이 남용될 우려가 있다는 정부 쪽 입장에 대해 판결문은 통렬하고 인간적인 언어로 답한다. 남용의 원인은 행정 지체 상황에 있으므로 제도를 보완해 난민 신청의 남용을 막아야지 난민 신청자를 난민 인정 때까지 난민이 아닌 것으로 추정해 생계지원도 하지 않고 취업도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문명국가의 헌법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란 문장은 문학적 위엄까지 갖추고 있다. 문신처럼 가슴에 새기고 싶을 정도다.”(한겨레신문 2013년 10월 15일자 이명수의 사람그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전문 보기)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 입국에 성공한 난민 가족들이 31일(현지시간) 뮌헨 중앙역 도착,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아빠들의 손을 잡은 어린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독일은 올해 최소 8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다른 유럽연합(EU) 회원국들에게 인구, 경제력, 기존 난민 수용 숫자, 실업률에 맞춰 난민을 나누자는 난민쿼터제를 제안했으나 스페인과 동유럽 회원국들의 반대로 무위로 돌아갔다. AP 연합뉴스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 입국에 성공한 난민 가족들이 31일(현지시간) 뮌헨 중앙역 도착,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아빠들의 손을 잡은 어린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독일은 올해 최소 8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다른 유럽연합(EU) 회원국들에게 인구, 경제력, 기존 난민 수용 숫자, 실업률에 맞춰 난민을 나누자는 난민쿼터제를 제안했으나 스페인과 동유럽 회원국들의 반대로 무위로 돌아갔다. AP 연합뉴스

“한국 땅에서 난민 신청자가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들은 피와 살로 현존하는 존재인데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된다. 아이는 무국적자가 된다. 현재 국내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법적 절차가 없다. 국적 없이 그럭저럭 살아도, 출생증명 ‘공문서’가 없다면 이 아이들은 자라서도 무국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의료·교육 서비스를 받거나, 결혼하거나 운전면허증을 갖고 투표하고 일을 하면서 신용을 인정받을 경로 자체를 근원적으로 차단당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한 아이가 어느 땅에서,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부가 기록해줘야 한다. 한국 정부가 속인주의의 현행 국적법을 안 바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에 체류하는 난민 신청자는 2915명이다. 이 중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222명이다. 난민 신청은 늘지만 한국은 이들에게 가혹한 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평균 난민보호비율은 인구 1000명당 2명이다. 한국은 인구 100만명당 2명에 불과하다. 억압과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차별과 배제뿐이다. 어른은 양심과 신념에 따른 결정을 고난으로 감당한다고 쳐도, 그 아이들에게까지 그만큼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태어난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은 출생등록도 받지 못하고, 필수 예방접종 등 어떤 종류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다. 한 사회의 수준을 보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자의 삶을 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 난민 신청자의 아이들이 그들이다.”(한겨레신문 2011년 2월 26일자 기고 ‘출생신고도 못 하는 ‘난민’아이들’▶전문 보기)

“레비나스는 타자를 “외재성(外在性·exteriority)”과 “무한성(無限性·the infinite)”의 개념으로 정의한다. 외재성이란 자아(나)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아(나)로 환원되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무한성이란 그 어떤 범주나 체계로도 환원되거나 포획되지 않는 타자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 즉 자식·남편·부인·제자·애인·한 나라의 국민이 모두 타자다. 그 타자들은 ‘나’라는 자아의 지배 대상이 아니다. 타자들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일지언정 자신에 대한 오만한 지배를 거부한다. 그러나 조종(핸들링)되지 않는 타자를 나의 그물로 나포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고 부른다.

제3세계를 지배했던 식민주의 논리도 타자를 자기화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했다. 모든 독재정권 역시 자신의 그물에 다수 국민을 가두고 그것을 ‘애국’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개인 단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랑’도 사실은 ‘타자의 자기화’인 경우가 허다하다. 타자들은 나에게 ‘우연히’ 온다. 타자의 가까이 옴, 이 ‘근접성’이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생산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사로잡히는 책임, 사로잡힘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능동적 지배가 아니라 타자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엎드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사랑은 궁극적으로 감성이 아니라 의지이고 고통이다.”(중앙일보 8월 29일자 삶의 향기 ‘사랑하기의 어려움’▶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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