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소설가

등록 : 2018.06.27 11:02
수정 : 2018.06.27 11:19

[장정일 칼럼] 연인들의 천부 인권

등록 : 2018.06.27 11:02
수정 : 2018.06.27 11:19

지난 회 칼럼의 마감 하루 전인 6월12일, 내게는 두 개의 화제가 있었다. 하나는 싱가포르에서 성사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정상 회담.다른 하나는 6ㆍ13 지방선거를 통째 집어 삼켰던 여배우의 폭로 스캔들. 전자는 정보가 넘쳐 날대로 넘쳐난 상태라는 판단 끝에, 후자는 한 사람이라도 입을 닫는 것이 공명선거를 돕는 것이라는 뜻에서 선뜻 쓰기를 포기했다. 이제 마음 편히 후자를 화제로 삼기 전에, ‘한국일보’ 6월25일자에 난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존 에버라드는 북한이 핵무기를 영영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싱가포르의 북미회담을 국면 전환과 시간을 벌기 위해 김정은이 연출한 ‘쇼’일 수 있다는 암시를 내비쳤다. 권력자와 정치가들이 쇼에 달통해 있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이들이 손해가 뻔히 보이는 쇼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오로지 미국이라는 절대악과 일전을 치른다는 종말론적인 신앙 하나로 버틴 나라다. 그런 나라의 지도자가 적성국의 수괴와 악수를 하고 나면,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희생은 물론 세습마저 정당화했던 통치 원리가 해체되고 만다. 막걸리만 마시는 줄 알았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안가에서는 시바스 리갈을 마셨다는 것을 알게 된 술꾼들이 너도 나도 시바스 리갈을 욕망하게 된 것처럼,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국민에게 종말론과는 다른 욕망을 심어 주었다. 이런 자해 행위가 쇼일 수는 없다.

방송토론에 나온 김영환 바른미래당 경기지사 후보의 폭로로 재점화된 한 여배우와 공직자의 스캔들은 ‘김부선 스캔들’이 바른 이름이지, 절대 ‘이재명ㆍ김부선 스캔들’이 아니다. 김부선이 ‘인격살해’를 당하고 ‘허언증 환자’로 몰리게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스캔들의 실체는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훗날 공직자가 된 어느 유부남과 15개월간 밀회를 나눈 적이 있느냐 마느냐에 있지 않다. 이 스캔들은 그녀가 과거의 연인이었다고 지목한 남자에게 ‘자신과 사귄 적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실토하라는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저런 압박에 불응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헤어진 연인 모두에게 보장된 ‘천부 인권’이다. 사실 저런 공개적 협박이나 뒷소문(‘나 저 사람 하고 잤어’)은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인데, 이 경우엔 성별이 바뀌었다.

여배우는 문제의 남자가 총각이라고 사기치고, 공짜로 즐기고, 헤어질 때 협박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증언은 나에게 ‘진실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지만, 아무런 진실도 알 길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제3자’다. 유부남인 줄 알고서도 15개월간 계속해서 만났다면 거기엔 둘만이 아는 비밀이 생긴다. 대개 이런 경우엔 여자가 남자에게 “언제 이혼해요”라고 채근한다. 또 협박을 당했다는데, 협박을 당한 사람이 먼저 ‘침묵의 대가’를 제시한 건 아니었을까. 이 모두는 제3자의 소설일 뿐,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다.

유일한 진실은 김부선이 선거 국면을 이용해 사적 복수를 꾀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선거가 끝난 후가 아니라, 김영환이 6월5일 방송 토론에서 처음 이 스캔들을 꺼냈을 때 곧바로 “나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질책했어야 했다. 유권자들이 유부남과 연애하다가 뒤틀어진 ‘부도덕’한 연사의 주인공을 위해 표심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니체의 인간학’(다산북스,2016)에서 약함을 무기 삼아 “나는 약해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 사람은 절대 스스로 반성하는 법이 없고, 오히려 강자 때문에 영원한 피해자가 된 척한다. 강자에게 끊임없이 농락당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자화상을 계속 그리는 것이다. 이 이상의 둔감함, 태만함, 비열함, 교활함, 다시 말해 해악이 또 있을까!”

김부선 스캔들에 뛰어든 공지영은 자신을 진실의 증인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밀회를 나누었다고 가정하는 두 사람의 내밀한 갈등이나 거래에 대해서는 그 또한 아는 게 없는 제3자다. 소설가는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사적 복수의 도구로 허비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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