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등록 : 2017.05.13 04:40
수정 : 2017.07.01 15:51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한국어 책 불태우는 ‘화씨451’… 블랙리스트 예견했나

등록 : 2017.05.13 04:40
수정 : 2017.07.01 15:51

<10>우주의 음유시인 레이 브래드버리

#1

반 지성의 디스토피아 그린 고전

지식 통제하려는 어두운 욕망 담아

국정교과서 등으로 한국서 현실화

다큐 ‘화씨9/11’ 그에 대한 오마주

#2

시적 감성으로 영역 구축한 작가

스필버그, “내 영화의 뮤즈” 극찬

우주 시공간에서 덧없음 묘사해

시인의 마음으로 과학기술 보라

인류는 책을 통해 지식을 전수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책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진은 파주 지혜의 숲 도서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온통 무너져 내리고 건물 두 채만 간신히 남았다면, 하나는 병원으로 쓰고 나머지 한 건물은 무엇으로 써야 할까?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답은 도서관이다.

다른 모든 건물은 죄다 그 하나에 담긴다.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서 재건과 복구에 필요한 지식은 물론, 문학에서부터 경제, 정치, 공학 등등 뭐든지 필요한 책을 갖고 나와서 폐허 위에 앉아 읽는다. 독서란 우리네 삶의 중심이고 도서관은 바로 우리의 두뇌이다. 도서관이 없다면 문명도 없다.

레이 브래드버리 원작,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451'에서 주인공은 책을 불살라 없애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작품에 그려진 반(反) 지성의 디스토피아는 종종 현실에서 목격된다.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책이 금지된 반지성적 디스토피아

레이 브래드버리의 대표작 ‘화씨451’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책이다. 1953년에 처음 출판된 뒤 단 한 번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적이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독자들에게 스며들어 지금은 미국의 모든 도서관과 학교에서 필독서로 꼽는다. 제목은 종이가 불타는 온도를 의미하며 섭씨로는 233도가 된다. 주인공 직업은 ‘파이어맨(fireman)’인데 원래 뜻은 소방수지만 이 작품에서는 방화수, 즉 불을 지르는 사람이다. 그가 불살라 없애버리는 대상은 책이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근미래, 사람들은 자동차로 스피드를 즐기거나 벽면TV, 이어폰을 끼고 산다. 그런데 책만은 금지되어 있다. 독서는 물론이고 소지하는 것조차 불법이다. 주인공은 신고를 받는 즉시 동료들과 출동하여 숨겨진 책들을 끄집어내 불태워 버리고 책을 숨겼던 사람도 체포한다. 이렇듯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이웃소녀와의 대화를 계기로 책이라는 것의 내용을 궁금해 하는 불경죄에 눈을 뜬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인 50년대에는 ‘빨갱이’를 색출한다며 마녀사냥을 벌이던 매카시즘의 횡포를 고발하는 의미로 이해되었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책과 독서, 교육에 대한 대중매체의 위협을 경고하는 광의의 메시지로 확장되어 고전의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정치보다 더 근본적인 교육의 빈곤이라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과학기술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은 점점 지적 활동을 등한시하고 독서, 특히 문학을 비롯한 인문교양을 멀리하게 된다. 처음에 책을 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그저 책읽기를 싫어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되새김으로써 다시 또 책을 찾아드는 습관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나중에 정부가 나서서 정보를 통제하기 시작해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회의 말로는 필연적으로 통제 사회를 그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될 수밖에 없다.

책과 독서라는 신세계에 눈 뜬 주인공은 자신의 집에 책을 숨겨두고 읽다가 발각되어 결국 탈출한다. 그리고는 책을 보존하는 비밀결사에 합류하는데, 사람들을 소개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나는 플라톤의 ‘국가’요. 저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 또 저 사람은 ‘종의 기원’이오….”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책을 불태우기 전에 내용을 통째로 암기한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화씨451’은 교양상식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대(對) 테러전쟁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난맥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화씨9/11’이란 제목을 붙인 것도 브래드버리의 ‘화씨451’을 오마주한 것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전쟁 등을 비판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은 ‘화씨451’에 대한 오마주로서 그 제목을 따왔다. 스튜디오플러스 제공

화성의 아라비안 나이트

브래드버리 특유의 스타일은 단편 작품들에서 잘 드러난다. ‘화씨451’과 함께 그의 양대 대표작으로 꼽히는 ‘화성연대기’를 보면 왜 그를 우주의 음유시인이라 부르는지 잘 알 수 있다. 연작단편집인 ‘화성연대기’는 지구 인류의 화성 이주사를 서사시 형식으로 담고 있는데,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온갖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들이 초현실적인 몽환성을 깔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인간이 처음 화성에 도달하고 뒤이어 본격적인 화성 이민이 시작되며, 그 과정에서 사멸해가고 있던 화성인들은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화성을 찾았던 온갖 인간 군상들이 화성에서 겪는 이야기가 아련하고 애틋하기 그지없다. ‘화성연대기’는 80년대에 TV용 3부작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화성연대기’ 중에서 ‘밤중의 조우’라는 에피소드를 각별히 좋아한다. 각자 다른 시공간 우주에 살던 지구인과 화성인이 시공의 뒤틀린 틈에서 우연히 만나 소통의 경험을 나눈다. 서로 적대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자부심을 확인하며 우호적으로 대화하다가 다시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나눈다. 이 이야기는 ‘화성연대기’를 대표하는 메시지임과 동시에 어쩌면 SF 그 자체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우주의 시공 속에서 모든 것은 덧없음을 깨닫게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학이랄까.

이런 시적 감성이 유난히 충만해서 브래드버리는 여느 SF 작가들과 달리 일찍부터 주류문단의 주목을 끌고 평단의 지지와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그럴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은 작품들의 저변에 깔린 정서가 여느 SF 작가들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우주 영웅모험담이나 신기한 발명, 발견 등 스토리의 바탕에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의 팽창주의나 계몽주의가 당위성으로 깔려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는 섬세한 감수성에 젖어들며 잔잔한 자기성찰에 빠지기 마련이다. 주류문학의 정서와 SF, 판타지 형식의 환상적인 조합인 셈이다.

브래드버리는 SF문학사에서 그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위상을 지녔다. 쥘 베른이나 H. G. 웰스같은 SF문학의 시조들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그와 동시대를 풍미했던 SF의 3대 거장, 즉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와도 확연히 구별되는 자신만의 뚜렷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브래드버리처럼 쓰는 작가는 브래드버리뿐이다’라는,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급의 찬사를 들었다. 2012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브래드버리는 내 최고의 SF 작품들의 뮤즈였다. SF와 판타지에 관한 한 그는 영원불멸이다’라며 그를 기렸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우리의 문화와 세계를 확장시켰다. 그의 상상력은 우리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변화를 이끌고, 고귀한 가치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앞으로도 숱한 세대가 그에게서 영감을 받을 것이다’라는 공식 조사를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국정교과서 강행,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등은 지식과 표현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욕구를 여실히 확인시켜 주었다. 지난해 10월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예술행동위원회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한 문화예술인이 검은 옷을 입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치가 책을 불태웠던 독일 베를린 베벨광장에 지금은 책을 쌓은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위키미디어

한국 사회의 책은 안녕한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핵심 인물인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은 1966년에 ‘화씨451’을 영화화했다. 트뤼포 감독이 처음으로 찍은 컬러 영화였던 이 작품은 원작의 설정을 과감하게 재구성하면서도 주제를 잘 살린 수작으로 지금까지도 세계의 시네필 및 SF 팬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불타는 책들 중에 한글이 보이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 한국어 책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부터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어떤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영화가 나온 지 50여 년이 지나 21세기가 되어 한국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브래드버리는, 트뤼포 감독은 짐작이나 했을까.

사람들이 갈수록 책을 안 읽는 추세에 대해 염려의 목소리가 많다. 한편으로 교양콘텐츠를 활자매체로 습득하던 ‘구텐베르그 마인드’의 시대가 가고 이제 영상매체를 기본으로 삼는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아무튼 과학기술 가속 발달의 시대는 문명사적 전환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러한 시대에 여전히 브래드버리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자유로운 시인의 마음으로 과학기술을 대하는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레이 브래드버리

1920년 8월 22일~ 2012년 6월 5일.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내고 14세 때 가족을 따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서 책읽기를 즐겼고 10 대 초반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집안 형편상 종이가 귀해서 정육점의 고기 포장지에다 습작을 하기도 했다. 20대 중반에 전업 작가가 되어 특유의 몽환적인 스타일로 주류문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소설뿐 아니라 시나리오, TV 극본, 희곡, 시,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저작을 남겨 20세기 미국 문화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2000년에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평생공로상을, 2007년에 퓰리처상 특별상을 받았다. 2012년 화성탐사선 큐리오시티가 착륙한 지점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소개된 책>

화씨45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발행

화성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샘터 발행

세계문학단편선 18 레이 브래드버리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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