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논리로 ‘민족 프레임’ 내세워
“인접국가 간 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정부가 지난 3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고시하며 밝힌‘상고사ㆍ고대사 서술 강화’방침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갈수록 노골화되는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맞서 관련 교육을 강화한다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자칫 국수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도 높아지고 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지난 3일 상고사ㆍ고대사 강화의 목적으로“고대 동북아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우리 민족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학생들이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등 한반도를 포함한 고대 동북아시아를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주변국가들과 역사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해 중국의 군사력을 몸소 확인한 뒤 국정화 논의 전면에 나선 것을 우연이 아니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출범 첫해인 2013년부터 고대사 연구를 강화해왔다. 그 해 6월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위원회가 왜곡된 상고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교육부는 이듬해‘토대기초연구’명목으로 고대사 연구사업 예산 10억원을 증액했다.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역사기초자료연구사업 명목으로 지난해부터 고대사 연구에 연간 20억원의 예산을 배정하고 있다.
역사학계가 주목하는 지점은 2013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이‘환단고기’를 언급한 점이다.‘환단고기’는 한민족 영토가 시베리아와 중국 본토에 이른다는 등 통설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라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평가하기도 한다. 조인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이 책은 고조선의 영토와 영향력 등을 사료에 맞지 않게 너무 부풀려 놓은 데다‘남녀평권(男女平權)’ 등 20세기에나 등장하는 개념이 언급돼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상고사ㆍ고대사 강화 움직임은‘민족’을 구심점으로 고대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친일행각 등 근현대사에 기록된 보수세력의 반(反)민족행태를 은폐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친일ㆍ독재 반대’를 명분으로 국정화에 반대하는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움직임을 무력화하기 위해, 주변국의 역사왜곡 행보를 강조하며 ‘국정화 반대=반민족주의’로 몰아붙이려는 것이 실제 의도라는 것이다. 한 사립대 정치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을 포함한 보수세력은 친일독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관련 근ㆍ현대사 서술을 최소화 하기 위해 고대사를 들고 나온 것”이라고 풀이했다.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의 선례도 눈 여겨 볼만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체제 유지를 위해 반공교육과 민족주의교육을 강화했는데,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고대사를 재조명했다. 역사학계는 정부가 국내 정치용으로 고대사 교육을 강화할 경우 자칫 국수주의로 흘러 외교적으로는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기 힘든 국수주의적 주장은 인접국가와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헌자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를 권력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강조할 경우 엄격한 사료해석을 본령으로 하는 역사학 연구의 퇴행을 불러올 수도 있다.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사료에 근거한 상식적 판단에서 벗어난 주장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식민사학자’로 매도하거나, 더 나아가 재야학자들이 여론을 선동해 영향력을 키울 경우 역사학 자체가 붕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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