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코드 없이 난해한 내용 많지만
보편적 감수성ㆍ스펙터클 등 잘 엮어
“크리스토퍼 놀런(44) 감독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당장 집합해.” 2012년 1월 초 워너브러더스 중역들이 긴급 소집됐다. 할리우드를 쥐고 흔드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임원들이 감독 한 명이 화가 났다는 이유로 긴장한 채 회의실에 모이다니. “감독이 범인을 색출해서 벌하래.” 갓 개봉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사운드 믹스를 다시 손볼 거라고 누군가 연예전문지 ‘할리우드 리포터’에 흘린 게 놀런 감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범인은 찾지 못했고 사건은 수 주가 지난 뒤에야 정리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최근 소개한 이 일화는 놀런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쉽게 말해 그는 현재 스튜디오로부터 백지수표를 받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임스 캐머런 이후 등장한 감독 중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놀런은 연출의 대가로 할리우드 톱스타만큼 거액을 받고 제작사 지분으로 수익금의 일부를 가져간다. 영화 한 편으로 수백억 원을 버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할리우드가 놀런 감독을 편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시나리오대로만 찍는 감독이다. 애초 계획한 대로만 촬영해 여분의 장면을 거의 남기지 않고 재촬영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제작비는 예산에서 남기기 일쑤고 일정도 어기지 않는다. 자신의 제작사 몸집을 키우는 데도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연출에만 신경 쓴다. 제작자인 아내 에마 토머스, 시나리오 작가인 동생 조너선 놀런과의 분업이 확실해 1억 달러 이상이 투입되는 영화를 2년에 한 편씩 내놓는다.
그는 마케팅에도 꼼꼼해서 미국은 물론 해외 홍보까지 확인한다. 영화의 내용이 미리 알려지는 걸 싫어해 배우들마저 인터뷰 때 감독에게 확인하고 답을 할 정도다. 그의 영화는 평균 2시간 30분이 넘는 상영 시간 내내 유머 코드도 없이 심각한 이야기만 하는 데다 종종 난해한 내용까지 펼쳐 놓지만 관객은 어렵지 않게 영화에 빠져든다. 철학, 윤리학, 심리학, 물리학 등 관객의 지적인 관심사와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가족애 같은 보편적인 감수성, 화려한 스펙터클 같은 오락적인 측면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가 놀런에게 사무실과 경비를 제공하고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게 해주는 이유다.
놀런은 한국에서도 이름만으로 홍보가 가능한 유일한 해외 감독으로 통한다. 6일 개봉한 ‘인터스텔라’는 19일 만에 한국 관객 700만명을 넘어섰다. 평일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하루 10만명 이상이 들고 있으며 아이맥스 상영관은 새벽 시간이 아니고선 표를 구하기 힘들다. 암표상까지 등장할 정도다. 놀런의 영화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는 관객이 적지 않다. 배급사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의 심영신 부장은 “감독의 팬들이 영화에 관한 정보를 온라인에 실어 나르고 입소문을 퍼트린 덕에 이 영화를 모르던 사람도 관심을 갖게 돼 흥행이 잘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놀런 감독의 명성과 팬덤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건 아니다. 독립영화 시스템에서 만든 초기작 ‘메멘토’와 ‘인썸니아’는 각각 2001년, 2002년 개봉해 서울 관객 20만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의 오프닝 ‘배트맨 비긴즈’(2005)도 한국에서 92만명으로 신통치 않았다. 두 마술사의 경쟁을 그린 ‘프레스티지’(2006)를 본 관객은 65만명이었다.
한국에 놀런 신드롬이 생긴 건 2008년 ‘다크 나이트’가 개봉하면서부터다. 전국 408만명을 모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이 영화에 이어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스릴러로 풀어낸 블록버스터 ‘인셉션’(2010)이 592만명을 동원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는 639만명을 모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한국 배급 영화 중 1위에 올랐다.
‘인터스텔라’는 놀런에 대한 한국 관객의 지지가 극에 달한 작품이다. 슈퍼히어로 액션과 무의식의 난해한 세계에서 벗어난 그는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탐험이라는 매혹적 소재와 가족애라는 보편 주제를 결합해 잭팟을 터트렸다. 23일까지 한국 극장 수입만 5,050만달러(560억원)로 미국(1억2,093만달러), 중국(8,230만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천체물리학을 다룬 ‘인터스텔라’ 덕분에 관련 이론을 다룬 서적도 인기다. 놀런이 ‘인터스텔라’와 관련해 언급한 유일한 책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영화 개봉 후 판매량이 평소보다 2, 3배 늘었고 ‘엘러건트 유니버스’ ‘상대성 이론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도 판매량이 늘었다.
‘인터스텔라’의 700만 돌파 시점이 올해 외화 흥행 성적 1위인 ‘겨울왕국’보다 닷새나 빨라 1,000만 클럽 가입을 예상하는 이도 많다. 놀런의 이전 영화에 비해 지방 관객과 50대 이상 관객의 비중이 높아 흥행이 한동안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심영신 부장은 “에듀테인먼트(교육과 오락이 결합된 형태)가 각광 받고 있는 흐름을 타고 500만명 정도까진 가능하겠다 싶었지만 이 정도로 흥행이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며 “800만명은 넘을 것 같으며 1,000만 돌파는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 '인터스텔라' 속 과학과 관련된 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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