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경찰·피의자 진술 토대로 재구성한 뺑소니 사고 순간
지난 10일 새벽, 그날도 강모(29)씨의 퇴근은 늦었다. 화물차 운전일을 끝내자 시곗바늘은 거의 오전 1시 30분을 가리켰다.
기온이 떨어져 쌀쌀했고, 몸은 파김치가 다 됐지만, 무심서로에서 율량동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는 4월이면 태어날 딸 아이를 생각하니 없던 힘이 절로 솟았다.
손에 든 크림빵을 보고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임신 7개월째를 맞은 아내가 좋아하는 빵이었다. 아내는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도 사범대 출신이지만, 가족 부양이 먼저였다.
한적한 곳이어서 택시도 없었지만, 택시를 탈 생각도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새벽의 적막을 깨는 굉음이 난데없이 들려 왔다. 몸이 공중에 붕 떴고, 크림빵도 포물선을 그리며 땅에 뚝 떨어졌다.
20분만 부지런히 걸으면 아내가 기다리는 아늑한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영하의 차가운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아스팔트 바닥에 크림빵 조각들이 눈처럼 산산히 흩어져 내렸다.
술에 취해 귀가하던 허모(37)씨가 낸 뺑소니 사고였다.
그는 윈스톰 차량으로 강씨를 치고도 멈추지 않았다. 동료들과 소주를 잔뜩 마신 뒤였다. 혼자 마신 소주만 4병이 넘었던 터라 냉정하게 사리를 분별할 상황이 아니었다.
무심서로를 따라 더 직진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는 골목길로 핸들을 틀었다. 취중에도 큰길로 내달렸다가는 CCTV에 찍혀 범행이 들통 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매스컵의 집중 보도로 사고 나흘 뒤 자신이 친 게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연해졌지만, 당장 자수할 생각은 없었다.
불안해하면서도 그는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했다. 자동차 부품 업체인 직장도 정상 출근했다.
마음에 걸렸던 윈스톰은 사고 발생 열하루가 되던 지난 21일 음성 부모 집에 가져다 놨다. 그리고는 동료와 충남 천안의 정비업소에서 부품을 사, 사고 당시 망가진 부분을 직접 수리했다.
피해자 강씨가 '크림빵 아빠'로 불리며 국민적인 관심사가 됐지만, 수사의 진전은 고사하고 단서조차 나오지 않자 경찰은 당황했다.
뺑소니 사고 현장에 으레 있어야 할 자동차 부품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인근 주차 차량의 블랙박스는 성에가 끼었거나 미작동 상태여서 수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용의 차량은 정황상 제2운천교 쪽으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경찰은 제2운천교 방면의 민간 업소들에 협조를 구해 CCTV 자료를 거둬갔다. 방범용 CCTV를 시내 곳곳에서 운용 중인 청주시에도 SOS를 쳤다.
CCTV 동영상 자료들을 분석해 보니 BMW로 보이는 차량이 수상했다. 차량 뒷부분과 제2운천교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코너를 도는 장면이 민간 업소의 CCTV에 찍혔다. 경찰은 이 차를 용의 차량으로 의심하고 언론에 공개했다.
그러나 화질이 불량해 정확한 판독은 불가능했다. BMW 같았지만, BMW가 용의 차량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경찰 수사는 그렇게 꼬여만 갔고, 현상금까지 내걸고 노심초사 제보전화만 기다린 유족들은 점차 절망에 빠져들었다.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사고 지점에서 불과 170m 떨어진 무심서로에 있는 청주시 차량등록사업소의 CCTV가 단초를 제공했다. 이 사업소는 제2운천교와는 반대쪽에 위치해있다.
차량등록사업소 공무원 A씨는 어느 날 한 포털사이트에서 자신의 근무지 부근에서 발생한 '크림빵 아빠' 강씨의 비극을 다룬 뉴스를 읽고 있었다.
CCTV 화면이 흐릿해 용의 차량의 차종조차 특정되지 않는다는 내용에 시선이 꽂혔다. 반사적으로 도로 쪽을 바라보니 CCTV가 눈에 들어 왔다.
그는 기사에 "우리도 도로변을 촬영하는 CCTV가 있다"는 댓글을 달았다. 반응이 온 것은 지난 27일이었다. 경찰이 이 차량사업소를 찾아온 것이다. 사고 발생 17일 만의 일이었다. 경찰도 나름대로는 허씨의 부품 구입 내역을 추적하던 터였다.
갈팡질팡하던 경찰의 수사에 아연 활기가 돌았다. 차량등록사업소에서 가져온 CCTV 파일에 윈스톰이 포착됐다. 윈스톰의 운행 시간과 경로 등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가자 두말할 것 없이 윈스톰이 유력한 범죄 용의 차량이었다.
경찰은 사고 발생 19일 만인 29일 강씨를 치고 달아난 차량이 BMW가 아니라 윈스톰이라고 수정 발표했다.
경찰이 헛다리를 짚는 것을 보고 완전 범죄를 기대했을지 모를 허씨가 극도의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을 순간이다.
경찰 발표 뒤 2~3시간 지난 이날 오후 7시께 허씨의 아내로부터 "남편을 설득 중인데 경찰이 출동해 도와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허씨는 처벌이 두려웠는지 한때 종적을 감췄다가 체념한 듯 스스로 경찰서를 찾았다. 날이 바뀌기 직전인 이날 오후 11시 8분께였다.
많은 사람의 분노를 자아낸 '크림빵 아빠' 뺑소니 사망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부실한 경찰의 초동수사 속에 깊숙이 몸을 숨겼던 허씨는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됐다.
든든하고 기특했던 아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그를, 아버지 강씨(58)는 그러나 따뜻한 말로 용서했다.
"자수해서 고맙다. 원망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 사람도 한 가정의 가장이고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일텐데…"
연합뉴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