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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지방’에 사는 고교생들에게

입력
2017.04.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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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 주간지에서 굶주리는 청년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A라는 학생이 대학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생활이 어려운 친구 B가 옆에서 기다렸다가 A가 비운 식판을 갖고 배식대로 가서 밥과 반찬을 리필 받아 먹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사에 언급이 없었지만, 나는 B가 도시락 하나 챙겨나올 집이 없는 ‘지방’에서 온 학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고교 동창은 서울 유학생활에 대해 “가난 때문에 실어증을 앓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살인적인 등록금(세계 2위로서 1위 미국과 점차 좁혀지는 추세)에 살인적인 물가(집세 포함 세계 도시 중 6위, 식료품 물가 1위)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경 학생들은 가히 서울의 하위층을 깔아주고 있다. 나는 이들이 안타깝다. 수천억원의 적립금을 쌓아놓고도 민자기숙사비로 학생들에게 한달 70만원 이상을 받는 사학이라는 이름의 ‘기업들’. 교육이라는 허울의 이 착취시스템은 오늘날 한국이라는 지옥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교육부가 부추겨왔다. 나는 왜 사립 연세대가 국립 경북대보다 더 많은 정부 예산(2010년 연세대 2,349억원, 지역 국립대 중 가장 많이 받은 경북대 2,126억원)을 받는지 알 지 못한다. 왜 국립대들이 각종 재정지원에서 사립대와 똑같이 경쟁해야 하고, 총장직선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정 지원 사업에서 탈락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많은 적립금을 쌓아놓은 사립대들에 왜 등록금을 내리게 하지 않고 세금으로 등록금을 지원해서, 가뜩이나 높은 대학진학률을 부추기는지 알지 못한다. 한 학자는 “(재정을 국립과 사립 가리지 않고 나눠주니) 우리나라에 사립대가 있나요?”라고 했다. 그 지원금의 상당부분을 우수한 직업고교를 늘리고 육성하는데 쓰면 얼마나 좋을까.

교육부의 정책에 힘입어, ‘인 서울’ 광풍과 함께 지역 국립대학들의 위상은 한없이 추락해왔다. 나는 남부지방에서 자랐고 집 근처 국립대를 다녔는데, 풍족하지 못한 가정의 지역 고교생들이 갖는 딜레마를 잘 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서울로 보낼 여력이 안 된다”고 나를 붙잡을 용기를 내주셨던 것에 감사하고, 내가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철딱서니가 없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다. 등록금ㆍ생활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다. 이제 어머니가 이곳 저곳 많이 편찮으신데, 내가 그때 고생을 얹어 드렸다면 평생을 따라다녔을 죄책감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나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지역의 수많은 가정들이 작년에도 겪었고, 올해도 내년에도 겪게 될 답이 없는 현실이다.

성인이 되어서 더 많은 기회가 있어 보이는, 찬란한(찬란해 보이는) 도시로 떠나 독립된 대학생활을 즐기는 것은 그림 같은 꿈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역 인재들이 가까운 국립대학으로 많이 진학했으면 좋겠다. 이 착취 시스템에 덜 편입됐으면 좋겠다.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허세와 껍데기는 너무 쉽게 꿈으로 포장돼 왔다. 국립대들과 인재 유치 경쟁을 해야 할 때, 주요 사립대들도 등록금을 내리고 학생 귀한 줄 알 것이다.

물론, 불안하고 경험 없는 10대에 ‘서열놀이’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고 있다. 대입 관련 게시판을 보다가 대학순위를 두고 혐오와 경멸, 차별 가득한 언설을 쏟아내는 글들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을 학생들이 걱정된다. 언제나 나쁜 말은 더 믿기 쉽고, 편견의 말은 심장 더 깊은 곳을 찌르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든 편견을 줄이려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의 경험이 한정적이고, 순진한 편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시류에 ‘얍삽하게’ 편승하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그것을 좇는 사람들로 가득 찰 때 사회가 어떤 추락을 겪는지 우리는 고통스럽게 겪어 오지 않았나. 편견과 차별이 범람해도, 영국 거장 감독 켄 로치의 지적대로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대선 공약을 보니, 문재인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국립대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 저마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공약들을 들춰보고 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인 사회라 해도, 어쨌건 ‘희망’이라는 것을 꺼내 보는 게 얼마 만인가.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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