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 의무화 1년 맞았지만
원장이 열람 요건 따져 허락하고
의사 소견서나 경찰 동행 요구
영상 삭제ㆍ편집 의혹도 그대로
교사들은 죄인 취급에 가시방석
“부모ㆍ교사 함께 지침 마련해야”
세종시의 한 어린이집에 다니는 최모(33ㆍ여)씨의 딸(4)은 7월부터 담임교사 A(55)씨를 보면 뒤로 숨거나 소변 장애를 일으켰다. 최씨는 아이의 이상행동이 A씨의 정서적 학대 탓일 수 있다고 판단해 원장에게 폐쇄회로(CC)TV 열람을 요청했다. 원장은 “어린이집 평가인증 후까지 기다려달라. A씨를 내보내겠다”는 말로 시간을 끌었다.
딸의 불안감이 계속되자 최씨는 충남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했고, 최근에야 교사가 딸에게만 밥을 먹이지 않는 등 학대 정황이 담긴 CCTV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두 달치 영상은 열람이 불허돼 결국 경찰에 원장과 A씨를 고소했다. 최씨는 2일 “신체적 학대뿐 아니라 정서적 학대가 의심돼도 CCTV 열람 요청이 가능해졌지만 어린이집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딸의 불안 증세만 심해졌다”고 말했다.
어린이집 CCTV 설치 의무화 1년을 맞았지만 부실 운영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부모들은 어린이집이 내건 이런저런 제약 탓에 정작 CCTV 내용을 볼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설치만 할게 아니라 문제 발생 시 제대로 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1월 인천 송도 어린이집 교사의 4세 여아 폭행 사건을 계기로, 어린이집 CCTV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관련 법을 손질(영유아보육법 일부 개정안)해 그 해 9월 시행에 들어갔다. CCTV 설치는 현재 대부분 완료된 상태다.
문제는 CCTV 열람 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다. 개정안은 ‘아동학대나 안전사고 피해가 의심될 경우 보호자가 어린이집 원장에게 CCTV 열람을 요청할 수 있고 원장은 10일 내 학부모에게 승인 여부를 통지하도록’ 했다. 열람 요구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1차 역할을 조사대상일 수도 있는 어린이집 원장에게 맡긴 것이다. 세 살 아들을 둔 김모(34)씨는 “학대 의심 사유를 적어내도 CCTV 설치 및 운영 자체를 어린이집 원장이 주도해 원장이 열람 요건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면, 의사소견서를 제출하거나 경찰에 고소하는 등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부모들은 또 ‘최소한 범위 내에서 열람’을 허용하는 규정상 어린이집 측이 CCTV 영상을 고의로 삭제하거나 편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최모(40)씨는 “최근 아동학대 수사를 받은 정부세종청사 어린이집에서 일부 CCTV 영상 원본이 삭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며 “장기간 여러 정황을 놓고 불법 여부를 판별해야 하는 아동학대 범죄의 특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가이드라인 외에 개별 조건을 내거는 어린이집도 있다. 정모(30ㆍ여)씨는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의 한 학부모가 CCTV 공개를 요청했으나 원장은 전체 학부모 동의를 받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말했다. 일부 어린이집은 경찰을 동행하지 않으면 아예 CCTV 열람을 불허하기도 한다.
반면 어린이집 교사들은 CCTV로 인한 과도한 인권침해를 토로한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5년째 근무 중인 문모(29ㆍ여)씨는 “어린이집 곳곳에 CCTV가 설치된 이후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며 “방임으로 고발될까 두려워 잠시 휴대폰을 보는 것도 꺼려진다”고 털어놨다.
아동학대 예방과 증거 확보 측면에서 CCTV의 효용성은 입증된 만큼 정부가 세부 지침을 마련해 보육현장의 혼란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은진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학부모와 교사가 참여하는 어린이집 운영위원회를 통해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CCTV 운영에 관한 교육 방안을 서둘러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일단 학부모와 어린이집 사이의 견해차를 좁히고 신뢰를 높일 수 있도록 현장 지도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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