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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15 14:04
수정 : 2015.09.16 19:29

[이정모 칼럼] 천고마비, 견마지로, 비육지탄

등록 : 2015.09.15 14:04
수정 : 2015.09.16 19:29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한 문재인 대표가 국회 당 대표실에서 잠시 머물며 이종걸 원내대표와 비공개 대화를 마친 후 국회를 나서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김대환 위원장 등 노사정 대타협 주역들이 1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노사정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89차 본위원회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을 만장일치로 의결한뒤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장관 (왼쪽부터),최경환 경제부총리,김대환 위원장,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 김정숙 세계여성단체협의회장. 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가을이다. 예전에는 이맘 때가 되면 라디오에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살찐 말이 유유히 풀을 뜯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을 떠올렸다. 하지만 동양과학사 연구가인 김태호 교수는 ‘삼국지 사이언스’에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천고마비’라는 사자성어에서 살이 찌는 말은, 땅에 붙박여 농사를 짓고 사는 한족(漢族)의 말이 아니라 유목생활을 하는 북방민족의 말이다. 가을은 유목민족들이 살이 오른 말을 몰고서 농경민족의 영토로 쳐들어오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따라서 ‘천고마비’라는 말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고, 농경민족들에게는 오히려 일종의 공습경보라고 할 수 있다.

아뿔싸! 가을이다. 공습이 시작되었다. ‘쉬운 해고’와 ‘임금피크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노사정 타협안이 마련되었고 한국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이 타협안을 추인하였다. 이제 곧 의원 발의 형식으로 노동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될 것이다.

농경민족이라고 해서 말을 키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말을 어떻게 타느냐가 문제일 뿐. 늘 말을 타는 유목민족은 말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 정도 솜씨가 없는 농경민족은 말에 직접 타는 대신 수레를 달아 전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전차와 기병을 비교하면 전차가 여러모로 불리하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 병사 두세 명이 타고, 그 중에서도 말몰이꾼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다. 수레가 무거워 말도 빨리 달리지 못하고 방향 전환도 어렵다.

천고사설 삽화

재계와 정부는 거대한 기병군단처럼 움직인다. 유연하고 일사분란하며 뛰어난 협동심을 발휘하면서 빨리 전진하고 있다. 1996년 노동법을 날치기 할 때는 상상도 못 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 합의안을 한국노총은 그냥 받아들였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민주노총과 야권은 마치 농경민족의 전차병단 같다. 속도는 나지 않고 전투력은 부족한데 직접 전투에 나서기보다는 말몰이꾼 역할만 하려고 한다.

말을 탈 때는 등자(발걸이)에 발을 걸고 안장에 오른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하도 흔히 보는 장면이라 그런지 우리는 등자는 마치 말과 세트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등자는 3세기 후반에야 발명되었다. 삼국지 이야기가 끝날 무렵의 일이다.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동탁 같은 삼국지의 영웅들은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말갈기를 꼭 붙잡고 두 다리로 말 등을 힘껏 조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등자가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무게중심이다. 등자 없이 말을 타려면 허벅지로 말 등을 단단히 조여야 한다. 무게중심이 허벅지 아래로 내려갈 수 없으므로 불안정하다. 하지만 등자에 발을 걸고 탈 경우, 발에 힘을 주면 체중을 두 발에 실을 수 있으므로 무게중심이 발로 내려갈 수 있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내려가면 양 옆에서 미는 힘에도 잘 견딜 수 있어서 말을 탄 채 칼이나 창을 들고 격렬한 싸움을 할 수 있다. 진보 성향의 정부 10년을 지나는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은 상층부에서만 이루어졌다. 무게중심을 내려야 한다. 등자에 체중을 실어야 한다. 그래야 싸울 수 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라는 말이 있다. 개나 말처럼 온 힘을 다해서 충성하겠다는 의미다. 어감이 썩 좋지는 않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밝힌 자료에 따르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던 어떤 교사가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불합격 통지를 받자 다시 지원할 때 쓴 문구라고 한다. 때는 1939년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지배당하던 시절이었다. 20여년 후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조국의 경제를 압축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견마지로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짓이지 말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힘은 세지만 주의가 산만하기 때문이다. 말은 초식동물이다. 먹이사슬에서 육식동물의 아래에 있는 초식동물의 기본은 바로 경계다. 시각, 청각, 후각 등 온갖 감각을 동원하여 포식자의 동태를 살펴야 한다.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말도 그렇다. 눈이 얼굴의 옆면에 달린 말은 시야가 350도나 된다.

말이 넓게 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의 시야를 좁히기 위해 눈가리개를 붙였다. 양쪽 눈 뒤쪽에 가죽이나 고무로 만든 눈가리개를 붙여서 오직 앞만 보게 만들었다. 소리에 민감한 말에게는 귀마개까지 씌운다. 오직 말몰이꾼의 명령에만 집중하게 한 것이다. 말의 처지에서 보면 한심한 일이지만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장치이다. 말이 주위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전진, 전진, 또 전진하게 하니 말이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다. 왕이 백성을 말처럼 부리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국민의 뜻을 지도자가 말처럼 수행해야 하는 시대다. 이때 말에게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먼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도 있어야 하고, 주변국의 정세에 민감해야 하며, 자신이 선출한 지도자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국민들의 뜻과 바람도 알아야 한다. 그에게는 단 몇 명이 아니라 5,000만이라는 말몰이꾼이 있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서는 안 된다. 눈과 코와 귀를 다 열어야 한다. 눈가리개와 귀가리개를 벗어야 한다.

‘삼국지’에는 당시 등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하나 더 등장한다. ‘비육지탄(?肉之嘆)’이다. 유비가 형주의 유표에게 더부살이하던 중 “전쟁터에 오래 나가지 않았더니 허벅지에 살이 붙었다”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허벅지에 살이 붙어서 말을 탈 수 없다는 말이다. 딱 민노총과 야권의 처지를 말해주는 고사성어다.

가을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인데, 정부와 여당은 재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고 있다. 어이할꼬! 우리가 비육지탄에 빠져있어서는 안 된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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