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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조선의 실리외교

입력
2014.11.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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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외교정책의 기본틀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명나라에는 사대(事大)하고 일본ㆍ여진 등과는 사이좋게 지내는 교린(交隣)을 뜻한다. 사대의 상징적인 행위가 조공(朝貢)이었다. 조공을 사대주의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표면만 본 것이다. 미국 등지의 중국 유학생들이 한국 유학생들에게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었다”라고 주장하는데도 한국 유학생들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다는 말도 들었다. 해방 이후에도 식민사학자들이 득세하면서 제대로 된 국사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다. 한 나라가 독립국가인가 속국인가를 나타내는 표지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권력 선출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국왕선출권이 명ㆍ청에 있었다면 속국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선 임금 선출권은 늘 조선의 독립적 권리였다. 임란 때 구원군을 파견했다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선조 후사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도 조선의 뜻대로 광해군으로 결정되었다. 군사권을 누가 행사하느냐는 점도 중요한데 이 역시 조선 국왕이 갖고 있었고, 주요 관료들의 선발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조선이 명ㆍ청보다 국력이 약했다고 보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속국이라고 볼 근거는 하나도 없다.

조공을 경제적으로 표현하면 조공무역(朝貢貿易)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공무역이 조공무역인데 여기에 허가 받은 국제무역상인 역관(譯官)들의 사무역(私貿易)이 결부된 형태였다. 물론 명나라에서 금이나 말처럼 조선에서 많이 나지 않는 물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보통은 양국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교역했다.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조공무역은 조선의 이익이었다.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에서도 알 수 있는데, 조선 초기 명나라는 3년 1공(貢), 즉 3년에 1번의 조공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거꾸로 1년 3공(貢)을 주장했다. 조공무역이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라면 3년에 한 번 오라는데 1년에 세 번 가겠다고 자청할 까닭이 없었다. 조공은 정치적으로는 대국인 명나라와 사이좋게 지냄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는 것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국제무역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얻는 경제행위였다. 조공의 원칙은 ‘조공이 있으면 사여(賜與)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공국에서 공물을 제공하면 사대국에서 답례로 사여를 내리는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많은 것 또한 원칙이었다. 이는 상국(上國), 즉 천자를 자칭하는 황제국의 정국 안정비용이자 체면 유지비용이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 초기의 사대외교는 인조반정 이후의 사대외교와는 확연히 달랐다. 명(明)나라 성조(成祖) 영락제는 1406년(태종 6)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安南)을 침략해 호조(胡朝)의 개국시조 호 꾸이 리(胡季?) 부자를 납치하고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켰다. 명나라는 내사(內史) 정승(鄭昇)을 사신으로 보내 조선에 이 사실을 알렸다. 개국한 지 14년밖에 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큰 공포를 느낄만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이 사태를 논의하는 어전회의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태종실록 7년 4월 8일)라고 말했다. 명나라에 사대함으로써 분쟁을 방지하겠지만 여차하면 결전하기 위해서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겠다는 것이었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3년(1421) 허물어진 도성(都城)의 수축문제가 나오자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도성을 수축하지 않을 수 없는데, 큰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수고함이 없이 오래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수고를 맡고 편안함을 주상(세종)에게 물려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세종실록, 3년 10월 13일)라며 공사를 강행했다. 이때 태종이 도성을 수축한 것은 명나라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지금 서울 남산에 남아 있는 나성(羅城)도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명나라와 전쟁할 것에 대비해 쌓은 것이었다. 명나라라고 이런 사실을 왜 몰랐겠는가? 자국의 성을 쌓는데 간섭할 명분은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경국대전 ‘예전(禮典)’에 사대(事大) 절차를 명문화한 나라지만 그 중심은 항상 조선의 국익이었다.

최근 예산까지 확보되어 입찰 공고까지 냈던 독도의 접안시설 공사를 두고 외교부 장관이 “일본정부를 자극할 수 있다”고 주장해 입찰공고가 철회되었다는 보도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시작전권 환수 무제한 연기에 이어 식수확보를 위한 담수화설비와 파도를 막는 방파제 같은 접안시설 설치에도 일본의 눈치를 보다니 자존심이 크게 상한다. 일본 관방장관이 “일본영유권에 속하는 독도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진일보의 조치”라고 말했다니 잘못된 신호도 한 참 잘못된 신호를 준 것이다. 이런 것은 전혀 실리외교라고 할 수 없다. 빨리 접안시설 공사를 개시해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각인시키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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