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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늘 소리 없이, 안개와 함께, 덩어리로 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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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늘 소리 없이, 안개와 함께, 덩어리로 몰려와

입력
2014.10.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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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왔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수정되고 싹도 나기 전에 잘려 나가

겨우 낚아챈 생각들로 글 쓰지만

완성된 과정은 아무도 몰라

작가들 가장 쓰기 싫어하는 글이

끝낸 작품에 대한 창작노트

이미지로 떠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생각은 대체로 언어 형태로 나타나

김중혁 단편 '1F/B1'의 창작 노트. 글이 막힐 때 했던 낙서와 인물 간 관계도 등이 그려져 있다.
김중혁 단편 '1F/B1'의 창작 노트. 글이 막힐 때 했던 낙서와 인물 간 관계도 등이 그려져 있다.

프롤로그에 이은 첫 회를 시작하자니 막막하기만 하다. 절대반지를 찾으러 간다는 둥 창작의 비밀을 캐내겠다는 둥 말은 그럴 듯하게 했지만 과연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시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서머싯 몸의 명언이 떠오른다. “소설을 쓸 때의 세 가지 법칙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게 하는 데는 열 가지 비법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모른다. 정말 모른다. 실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가 ‘자신의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말이 된다. 나는 모른다. 분명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산문을 쓰기 시작했겠지만 그 생각이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완성된 작품에서 출발해 최초의 아이디어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완성된 작품으로 오는 중에 많은 생각들이 버려졌고, 많은 결정이 수정됐으며, 어떤 생각은 싹이 나기도 전에 잘려 나갔다. 도중에 어떤 일들이 생긴 것일까.

몇 해 전 여러 작가의 소설이 함께 실리는 책에다 창작 노트를 써야 할 일이 있었다. 단편 ‘1F/B1’(일층, 지하 일층)이라는 작품의 창작 노트였는데, 내가 알기로 작가들이 가장 쓰기 싫어하는 글 중의 하나가 창작 노트다. 소설을 이미 완성해서 넘겼는데, 손을 털고 씻었는데, 그 작품을 어떻게 쓰게 됐으며 어떤 방식으로 쓴 것인지 말하라고 한다.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작품집의 창작 노트에는 작가들의 당혹감과 어쩔 수 없이 쓴다는 체념이 가득하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창작론에 대해 적었고, 어떤 작가는 소설을 다 쓰고 난 후의 퇴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고, 어떤 작가는 소설을 처음으로 시작한 장소를 묘사했다. 누구도 소설을 쓰게 된 과정을 적지 못했다. 혹은 적지 않았다. 작업 공정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일이라면 간단하다. ‘4월 12일 3시 아이디어 떠오름. 4월 15일 2시 첫 문장 시작. 4월 25일 1시 1차 제작 완료. 약간의 수정 필요함.’ 이런 식의 일지를 적을 수 있다면, 나도 기꺼이 그 일지를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생각은 늘 소리 없이 오고, 안개와 함께 오고, 덩어리로 몰려 오고, 가끔은 자신이 왔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가버린 생각은 영영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 생각을 낚아채는 것일까. 우리는 생각을 낚아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며 그 생각의 몇 퍼센트를 이용해 창작물을 완성하는 것일까. 쓰고 남은 생각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생각들은 이전에 했던 생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이 생각의 재활용일까, 아니 어쩌면 생각의 리메이크일까. 생각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다.

나는 그 작품집에다 ‘진짜’ 창작 노트를 실었다. 단편 ‘1F/B1’을 시작할 때 했던 메모들, 잘 써지지 않을 때 했던 낙서들,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던 인물들의 관계도 같은 것을 그대로 실었다. 일단 창작 노트를 문장으로 쓴다는 게 너무 귀찮았고, 할 말도 없었다. ‘1F/B1’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은 이미 작품 속에 다 썼고, 더 보태야 할 말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정도뿐이니 아예 내 ‘날 것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럽기도 하다. ‘미디엄 레어’ 정도로 익혔어야 했는데, 완전 ‘레어’의 형태로 내보인 것은 아닌가 싶다. 한 선배는 “업계 비밀을 이렇게 다 까발리면 어떻게 하냐?”는 농담을 하며 웃었다. 선배의 농담을 평상어로 해석하면 이런 거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 채 작품을 완성한다는 걸 독자들에게 알리지 마라” 정도일 것이다. 소설가들은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참 잘도 소설을 쓴다. 모르고 하는 일인데, 어떤 때는 잘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신기한 일이다.

생각은 대체로 언어의 형태로 나타난다. 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나 디자이너처럼 문자보다 이미지의 형태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지 형태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알아보고 싶다) 이건 아마 특별한 경우일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문자의 형태로 생각을 할 것이다.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날 때, 우리는 뱃속의 빈 공간을 느낌과 동시에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때로는 그 문장을 직접 말하기도 한다. “아, 배 고파.” 문장을 떠올리고 나면 더욱 배가 고프다(글 쓰고 있는 지금 배가 고프다 보니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인간은 언어라는 체계를 이용하여 문명을 만들었고, 언어를 통해 기억하고, 언어와 함께 공감한다. 공통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경험의 폭을 확대하기도 한다. 책을 통해서 수많은 생각을 만날 수 있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쌓아 올리고, 가끔 모든 생각을 허물기도 한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자세히 해부해보면 생각을 발굴하는 비법을 쉽게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작가들은 언어를 이용해 집을 짓는 사람이므로 언어에 민감하고 생각을 낚아채는 일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다른 작가를 찾아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묻기 전에, 우선 내 패부터 ‘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건 ‘원 페어’뿐이지만 (카드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무척 낮은 등급의 패다) 솔직히 밝히고 ‘뻥카’를 치지는 않을 생각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생각 따위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출발점은 여기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하는 셀프 인터뷰는 어떤 대답을 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질문이 아니다. ‘창작의 비밀’을 시작하면서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차곡차곡 모아놓았고, (지금도 모으고 있는 중인데) 그 질문 중 일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소설가 김중혁 씨를 만나보겠다.

느리게 움직이며 집중할 수 있는 곳

물과 함께할 때 좋은 생각 잘 떠올라

노트ㆍ휴대전화 이용 메모하지만

깊은 사색 필요할 땐 생각에만 집중

_어떤 때에, 혹은 어떤 장소에서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오릅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곳은 물과 관련된 장소들입니다. 샤워를 할 때면 풀리지 않던 문제가 해결될 때가 있습니다. 글이 막혀서 도저히 풀리지 않았는데, 샤워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다음 문장과 문단이 생각나는 겁니다. ‘아, 다음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면 되겠구나, 그리고 이런저런 흐름으로 써나가면 논리적으로도 말이 되겠어’와 같은 생각들이 나면 샤워를 계속 합니다. 종이에다 정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떠오른 생각들을 완결시켜야 합니다. 아인슈타인도 샤워 도중에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하더군요(아인슈타인과 저를 비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물 소리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 소리가 사방을 가로막고 생각을 집중시켜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영을 할 때도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똑같은 동작을 계속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물뿐이고, 물 속에서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집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실내 수영장이 짧아서 ‘턴(turn)’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턴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고, 생각이 조금 깨집니다. 턴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실내 수영장이 있다면 (어마어마한 규모여야겠죠) 생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 중의 하나는 ‘산책할 때’입니다. 산책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풍경을 천천히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속도로 따지자면, 생각의 속도와 가장 비슷한 것이 산책의 속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_쓸모 있는 생각과 쓸모 없는 생각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긍정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떠오르는 생각 중에는 당연히 쓸모 없는 게 무척 많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이른바 ‘잡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잡념을 다 쳐내버리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럼 생각할 게 없어지고, 생각할 게 없어지면 생각을 멈추게 됩니다. 어떠한 잡념, 혹은 쓸모 없어 보이는 생각도 일단은 떠오르게 놓아둡니다. 놓아두면 어떤 생각들은 제풀에 지쳐서 사라져버리고, 쓸모 없어 보이던 생각들 중에 어떤 놈들은 제 힘으로 살아서 제법 높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쓸모 있게 변하기도 합니다. 잡념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좋은 생각이 잡념이 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의 구분을 없애는 것입니다.”

_메모를 많이 하시나요.

“예전에는 작은 노트와 펜을 들고 다니면서 메모를 했는데 요즘엔 휴대전화기를 이용해서 메모를 합니다. ‘에버노트’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데, 여러 종류의 기기에 동기화가 되기 때문에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간 곁가지로 새는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클라우딩이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클라우드 서비스’는 인터넷 서버에 중요한 데이터를 넣어두고, 어느 기기에서나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인데요, 그 이름이 ‘구름’이라는 게 좋습니다. 뜬구름 잡는 생각도 많이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나는 게 있으면 구름에다 던져두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물론 지금도 연필을 자주 이용합니다. 놓치면 안될 것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을 때는 컴퓨터나 휴대전화기를 이용하고, 느긋하게 끄적거리면서 솜사탕처럼 생각을 부풀리고 싶을 때는 연필과 노트를 이용합니다. 메모는 간단하게만 해둡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모두 적습니다. 짧은 메모들을 나중에 다시 볼 때 새로운 생각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을 해야 할 때는 메모를 하지 않습니다. 생각과 메모가 동시에 진행되면, 생각이 패하고 맙니다. 생각이 문자로 옮겨지는 순간, 고정돼 버립니다. 생각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게 하고 싶을 때는, 연필과 컴퓨터를 놓고 산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_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소설의 제목을 지을 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는 미리 생각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머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때는 소설을 쓰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있을 때 다음 소설을 구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대략적인 구상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경우에는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려면 우선 제목이 필요합니다. 제목이 없으면 소설을 시작하기 힘듭니다. 나중에 바꾸더라도 일단 제목이 있어야 합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조도 모르면서 일단 제목을 지어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는 머리 위에 붙은 안테나를 세우고 (어, 머리에 안테나 하나씩은 다들 있잖아요?) 사방으로 돌아다닙니다. 시디장의 시디를 꺼내서 영어 제목을 보기도 하고, 책장에 가서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기도 합니다. 인터넷 서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봅니다. 계속 제목을 생각합니다. 대사를 들어도 액션을 봐도 제목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만 생각합니다. 계속 제목을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제목이 정해집니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제목이 떠오릅니다. 책이나 시디나 영화나 드라마 제목과는 전혀 상관없는 제목입니다. 저는 그 과정이 좀 신기합니다. 제 생각에는, 수많은 제목들을 보면서 ‘제목이라는 크기’에 맞는 생각을 계속 하기 때문에 제목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_그렇게 정해진 제목은 바뀌지 않습니까.

“50 대 50 정도입니다. 어떤 제목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소설을 장악합니다. 제 경우에는 ‘악기들의 도서관’이라는 제목이 그랬습니다. 얼떨결에 지은 제목이지만 소설의 분위기와도 잘 맞았고, 소설 속의 아이러니를 충실히 반영하는 제목이 됐습니다. 얼마 전 출간한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제목을 지을 때 애를 먹었습니다. 후보도 많았습니다. ‘파편의 궤도’, ‘암흑 탐정’, ‘두더지 굴’, ‘악당들은 지름길로 다닌다’, ‘딜리터’ 등 서른 개가 넘는 제목이 후보였습니다. 제목을 적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게 됐고, 소설은 제목의 톤에 맞게 완성됐습니다. 제목 짓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것 같군요.”

잠깐이지만 소설가 김중혁 씨를 만나보았다. 내성적인 성격인 걸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묻고 싶은 게 더 많았지만, 소설가 김중혁은 앞으로도 종종 등장할 예정이니 이쯤에서 끝내고, 다음 회에서는 진정한 생각 전문가를 만나볼 예정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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