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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스위스

입력
2017.09.0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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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스위스의 주요 수입원은 용병이었다. 국토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목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나라였다. 이런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유럽의 전쟁터로 돈벌이를 나섰던 스위스 젊은이의 용맹과 신의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16세기 초 바티칸이 신성로마제국의 공격을 받았을 때 피신하라는 교황의 권고를 뿌리치고 맞서 싸우다 전원 전사한 것은 유명하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키다가 혁명군에 최후를 맞은 스위스 용병은 “죽음으로 우리의 신의를 지킨다”는 편지를 가족에게 남겼다.

▦ 이들은 목숨을 걸고 벌었던 돈을 조국의 은행에 맡겼다. 용병들의 피 묻은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스위스 은행 하면 떠오르는 신뢰의 뿌리다. 은행뿐 아니라 시계, 낙농, 기차 등 스위스를 세계 최고로 만든 산업의 근저에는 신뢰의 가치가 배어 있다. 북한 김정은은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유학한 때문인지 이런 스위스 제품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부인 이설주와 스위스제 커플시계를 차고, ‘선물정치’ 목록에 스위스 시계가 빠지지 않는다. 그가 뚱뚱해진 게 스위스 에멘탈 치즈를 광적으로 좋아한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 미국이 쿠바와의 관계를 정상화할 때까지 50년 넘게 쿠바에서 미국의 외교를 대변한 나라가 스위스다. 스위스의 역할이 없었다면 쿠바 미사일 위기를 넘길 수 없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란 핵 협상이 시작되고 타결된 곳도 스위스 제네바와 로잔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는 전쟁 문턱까지 갔던 북핵 사태를 수렁에서 건져 냈다. 지금도 스위스에서는 시리아 평화회담을 비롯해 세계 각국 분쟁의 중재와 비밀회담이 쉼 없이 열린다. 스위스가 갖는 신뢰의 힘이다.

▦ 중국, 러시아를 제외하면 평양에서 정부 차원의 인도주의 활동을 펴는 사실상 유일한 나라인 스위스가 북한 핵ㆍ미사일 사태를 중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도리스 로이타르트 대통령은 “중재자로서 훌륭한 봉사를 할 준비가 돼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대화를 위한 때”라고 했다. 물론 지금은 20여년 전 제네바 합의 때와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라 어려울 것이다. 중국, 러시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핵 폭주를 거듭하는 김정은이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스위스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이 제안을 귀담아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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