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모래섬 1971년 매립 시작... 올림픽 유치 꿈 10·26으로 물거품
전두환 정권 안정 위해 재도전장...1981년 바덴바덴서 유치권 따내
일등공신 재벌 기업에 건설 특혜... 달동네 서민들엔 강제 철거 시련
제2롯데월드·한전 부지 사업 등 인근 지역은 멎지 않는 개발 바람
1988년 9월 17일 오후 2시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그룹 코리아나가 부르는 '손에 손잡고'가 울러 퍼졌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에서 개최된 올림픽 개막식에서 이 노랫말은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160개국 1만3,034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해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한 서울올림픽. 이 행사를 계기로 한국의 이미지가 크게 바뀐 것은 사실이다. 한국은 이미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한국전쟁 이후의 황폐하고 가난한 국가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서울올림픽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데 기여했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처음 유엔총회에서 연설한 것만 봐도 국가 위상의 향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이 국제적인 종합 경기를 유치한 것은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이 처음이다. 그러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돌연 북한의 군사 도발 위협과 대회 개최 자금 조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개최권을 반납했다. 이로 인해 직전 대회 개최지였던 태국의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을 급히 다시 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7년간 서울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등을 지내며 20년 넘게 중앙도시계획위원으로 활동했던 손정목(87)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아시안게임을 물리는 바람에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25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손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서울 도시 개발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잠실 공유수면 매립공사 과정에도 참여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훗날 올림픽이 개최됐다. 잠실(섬)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 가운데 있는 황량한 모래 섬이었다. 그러다가 1971년 매립 공사를 시작해 북쪽 신천의 강 폭을 넓혀 한강 본류로 흐르게 하고 남쪽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육지와 붙였다. 매년 홍수로 물에 잠기는 잠실섬을 육지화하는 계획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건설회사 즉 재벌 기업들로부터 끌어다 쓴 정치자금의 대가로 내어준 사업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곳은 잠실종합운동장과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되는 개발지가 된다. 손 교수는 “당시 이 땅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가격도 평당 300~500원에 불과했다”면서 "박정희 정권이 아시안게임을 반납하고 1973년 이곳에 올림픽 경기장 건립 계획을 발표하고 추진했지만 당시엔 분단 국가인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릴 것으로 본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이 올림픽 유치 계획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1979년이다. 하지만 그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올림픽 계획은 잊혀진다. 그러다가 혼란한 정국에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이 1980년 올림픽 유치 계획을 다시 꺼내 든다. 권력 획득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던 데다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숨지게 한 원죄가 있는 전두환 정권에게 올림픽 유치는 안팎으로 이미지를 만회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한국은 1981년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해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기어코 올림픽 유치권을 따냈다. 경쟁 상대는 올림픽 유치를 5년 동안 준비한 일본의 나고야였다.
그러나 대회 개최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대형 경기장과 그것을 짓기 위한 재원 마련이 큰 일이었다. 관련 비용이 2조원 이상으로 추산됐는데 당시는 이 정도의 돈을 정부 혼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 재벌기업과의 파트너십은 신의 한 수였다.
이와 관련해 정희준 동아대 생활체육학과 교수는 “(서울올림픽을 매개로) 재벌과 정치가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면서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 공신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이 바덴바덴으로 달려가 올림픽 유치 활동에 힘을 보탰고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과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배종렬 한양주택 회장 등 재벌 총수 7명이 지원단을 구성하고 자사 직원을 차출해 발로 뛰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건설사를 낀 재벌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이지요.”
정 교수에 따르면 건설 재벌들은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으나 1980년대 들어 중동 경기 악화로 위기에 몰렸다. 경기가 좋을 때 사들였던 중장비와 고용 인력이 남아 도는 상황에서 올림픽 유치는 건설 재벌들이 위기를 타개할 결정적 기회였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유치에 나섰던 재벌들에게 올림픽 경기장 건설, 도로 건설, 재개발에 따른 아파트 건설 등 돈이 될 사업을 안겨준다.
1982년에는 서울시 합동재개발 정책이 시작됐다. 올림픽 때 한국을 찾을 외국인이 보기에 미관상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목동, 상계동, 사당동 등 가난한 사람이 살던 달동네의 주택을 강제 철거했다. 당시 살던 곳에서 쫓겨난 서울시민이 7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거 과정에 깡패가 동원됐고 건설사도 개입했다. 이 같은 폭압적 이주정책에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도시 빈민운동이 본격화했다. 1983년부터 3년간 이어진 목동 철거민 투쟁은 그 대표 사례다. 목동이 지금은 부유한 아파트 촌이지만 당시에는 안양천을 끼고 형성된 뚝방촌으로 약 3만2,000명이 살고 있었다. 1985년 4월에는 사당동 주민들이 강제 철거 항의 투쟁을 시작했으며 오금동, 신정동 등 다른 철거지역 주민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내쫓긴 사람들의 사연은 김동원 감독이 1988년 제작한 27분짜리 다큐 영화 '상계동 올림픽'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영상에는 올림픽 유치를 명분으로 공무원, 용역깡패, 경찰이 합세해 삶의 터전을 짓밟는 모습과 더불어 자신이 살던 작은 집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주민들의 눈물이 나온다.
정 교수는 “서울올림픽은 독재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내치를 위해 이용된 정치 색채가 강한 올림픽”이라면서 “외국의 일부 학자는 '1936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보다 더 심했다'고 평가할 정도”라고 말했다.
올림픽 때 성화가 타오르던 잠실 지역은 지금 아파트 등 고층 건물이 가득하다. 최근에는 서울시가 코엑스부터 잠실종합운동장에 이르는 영동권역을 ‘국제교류 복합지구’로 개발하겠다는 계획까지 내놓았다. 잠실에는 123층짜리 제2롯데월드가 올라가고 있다. 탄천 건너편 한전 부지는 감정가격이 3조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재벌들의 각축장이 됐다. 잠실 일대는 26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개발의 바람에 휩싸여 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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