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서 정상까지 성공 스토리… 볼트 발목 부상 슬럼프로 고비
알리 베트남전 거부 실형 시련… 역경 극복한 영원한 챔프 명성
‘인간 번개’ 우사인 볼트(29ㆍ자메이카)는 복싱 전설 무하마드 알리(73ㆍ미국)와 종종 비교된다. 영국 BBC는 24일 볼트가 2015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 결선에서 저스틴 게이틀린(33ㆍ미국)을 0.1초 차이로 제치고 대회 2연패를 달성하자 볼트의 행보가 알리와 비슷하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볼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무명의 선수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00m 결선에서 보란 듯이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 뒤이어 200m와 4x100m 계주에서도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인간 탄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알리는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1964년 2월 25일 첫 헤비급 챔피언 벨트에 도전했다. 알리는 당시 무명이었으나 경기 전 인터뷰에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왼손 잽으로 세계 헤비급 통합챔피언 소니 리스튼을 TKO로 꺾고 ‘영원한 챔피언’의 탄생을 알렸다.
볼트는 2009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독주 체제를 유지했다. 남자 100m 9초58, 200m 19초19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다. 볼트가 2011년 대구대회에서 100m 결선 부정출발로 인해 실격한 것을 제외하면 볼트는 그 이후로도 2013 모스크바 세계 선수권 대회까지 100m, 200m, 4x100m 계주에서 올림픽 금메달 6개(2008 베이징 3개, 2012 런던 3개)와 세계선수권 금메달 8개(2009 베를린 3개, 2011 대구 2개, 2013 모스크바 3개)를 획득했다. 볼트의 독주는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볼트는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 이후로 고질적인 발목 부상에 시달리며 슬럼프를 겪었다. 부상으로 인해 2014년에는 대회에 10번도 출전하지 못했고 2015년에는 단 한차례 출전해 10초12로 뒷걸음질 쳐 볼트의 시대가 끝나는 듯 했다.
알리 역시 챔피언이 된 뒤 종교적인 이유로 개명을 하며 흑인 차별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1965년 소니 리스튼과의 재경기에서 1회 KO승을 거두는 등 3년 동안 모든 도전자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알리는 베트남전에 보내려는 미국 정부에 의해 모든 것을 잃었다. 알리는 베트남전 참전을 명령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라며 징집을 거부했다. 그러자 미 법원은 참전에 반대하는 알리의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고 선수자격을 정지했으며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 이후 알리는 3년여 링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알리는 반전여론에 힘입어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1971년 조 프레이저와 복귀전을 갖게 됐다. 하지만 긴 공백을 이기지 못한 알리는 생애 처음으로 패배를 맛봤다. 그러나 알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3년 후 프레이저와 재대결해 승리를 누르고 1974년 WBA/WBC 통합챔피언 조지 포먼(당시 40전 40승 37KO)과 붙게 됐다. 알리는 32세의 나이로 이미 기량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포먼의 계속된 공격을 피하며 8회 카운터펀치로 포먼을 잠재웠다. 볼트 역시 2015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게이틀린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볼트는 23일 열린 100m 결선에서 1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챔피언의 귀환을 알렸다. 또한 이번 금메달로 세계선수권 금메달 개수를 9개로 늘리면서 칼 루이스(8개)를 따돌리고 이 부분 역대 최고 선수가 됐다.
볼트도 시간이 지나면 은퇴하겠지만 그가 보여준 운동 선수로서의 모습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알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한 챔피언’으로 남았듯이 볼트도 육상선수로서 ‘영원한 스프린터’로 남기를 바란다.
이건우 인턴기자(서울시립대 경제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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