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다시 그리는 보물지도

입력
2017.06.16 15:09
0 0

스코틀랜드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은 특이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수필과 평론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몸이 약해 어린 시절 정규교육을 받기조차 힘겨웠다는 그는, 등대기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건강상 사유’를 들어 간단하게 뿌리쳤다. 대신 유럽 각국 좋은 곳을 돌아다니며 글 쓰고 친구 사귀는 데 진력했다.

저 유명한 모험소설 <보물섬>을 쓴 건 결핵 치료차 찾은 스위스 다보스에서였다. 그 전 해인 1880년, 스티븐슨은 4년간 사귀던 미국인 유부녀 패니 오즈번과 결혼에 골인한 상황이었다. 금지옥엽 키운 외동아들이 대서양 건너 나라 유부녀와 정을 통하자 스티븐슨의 부모는 어지간히 애를 태운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금지된 사랑이 가장 화려한 불꽃을 피운다. 아들을 뜯어말리다 못해 재정적 지원까지 끊어버린 부모의 태도가 병약한 스티븐슨의 몸과 맘에 열정을 지폈다. 그는 연인이 사는 캘리포니아로 갔고, 첫 남편과 막 이혼한 패니 오즈번과 결혼했다.

다보스에서 휴양하는 틈틈이 스티븐슨은 아내 패니가 데려온 의붓아들 로이드와 함께 그림 그리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여러 이야기를 지었다. 어릴 적부터 물리게 보았던 항구와 바다를 배경 삼아, 아들 또래 소년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스티븐슨은 직접 그린 지도까지 곁들여 의붓아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주었고, 소설은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며 명작 반열에 올라섰다.

항구에 잇닿은 ‘벰보우 제독 여인숙’ 아들 짐 호킨스는 이후 오랫동안 전 세계 수많은 어린이의 워너비 스타였다. 충청도 시골에서 자라 바다를 볼 기회가 없던 나에게도 <보물섬>은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하는 <허클베리핀의 모험>과 전혀 다른 느낌을 선물했다. 거센 파도 일렁이는 바다와 낡아빠진 해적선이 불러일으키는 설렘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낭만적 판타지에 다름 아니었다.

짐의 모험에 견주자면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미미한 대로 유사체험을 할 기회는 우리에게도 있었다. 소풍날 찾아오는 보물찾기. 학교 뒤편 냇가로 떠났던 초등학교 3학년 봄소풍은 특별했다. 김밥과 사이다로 점심을 먹은 우리 손에 어설프게 그린 보물지도가 쥐어졌다. 보물은 풀섶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찰랑찰랑 오금을 간질이는 냇물 건너 바위틈과 나뭇가지, 물 아래 깔린 자갈과 수초 사이에도 비닐에 싸인 쪽지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보물을 찾고 모래무지를 잡았다. 틀림없이 ‘보물섬’을 읽으셨을 고마운 선생님은 지금은 무얼 하고 계실까?

지난 5월 초 가족여행을 앞두고 그 기억을 떠올렸다. 모임 때마다 장기자랑 하느라 애쓰는 어린 조카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책 살 때 딸려온 가죽필통, 미니선풍기, 텀블러, 은행에서 적금 들고 받은 찻잔이며 우산, 프라이팬 세트,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산 가방과 모자, 엽서 등을 트렁크에 주섬주섬 담았다. 여행 마지막 날, 작은 개울까지 딸린 숙소 앞 정원에서 보물찾기를 했다. 대충 그린 보물지도를 손에 쥐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대소동이 벌어졌다. 애들이야 그렇다 쳐도 늙은 어른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정말 의외였다. 여든 살 넘은 엄마가 명쾌하게 정리했다. “재밌잖니? 모처럼 철부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네. 살펴보면 세상사 숨은 보물 천지일 텐데, 싶은 마음도 새삼 들고...”

가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우리 형제는 보물찾기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이번 주말로 돌아온 아버지 생신 모임이다. 스카프며 머그컵 등을 챙겨 넣다가 <보물섬> 완역판을 아직 못 읽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오가는 기차 안에서 읽을 요량으로 한 권을 주문했다. 결국 또 책이라는 게 밋밋하지만 뭐 어떠랴, 그 모든 보물의 뿌리는 이 책 <보물섬>이었으니.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