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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의 욜로 라이프] 책을 발견해 드립니다...당신 마음에 꼭 맞는

입력
2017.05.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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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 같은 말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멋진 근육이 있다면 마음의 양식은 필수가 아니다. 길은 책보다는 스마트폰에서 찾기가 더 쉬워 보인다. 입에 가시가 돋는다면 책을 펴는 대신 영양제 한 알을 삼키면 될 일이다.

대체 왜 책을 읽지 않을까. 책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은 ‘책이 너무 많아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는 29일 “쏟아져 나오는 책 중에 무엇을, 어떻게 고를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운동화 10켤레 중에 마음에 드는 걸 찾는 건 어렵지 않지만 1,000켤레 앞에선 막막해지는 것처럼. 그래서 동네 책방들이 시작한 게 ‘책 큐레이션’이다. 콘텐츠를 분류하고 가치를 매겨 수요자에 맞게 골라 주는 큐레이션(Curation). 말하자면 나를 위한 책을 ‘발견’해 주는 서비스다.

“마음을 읽고 책을 처방해 드립니다”

최문선 기자가 서울 창전동 ‘사적인 서점’에서 책 처방을 받고 있다. 안전한 낯선 이에게 마음을 털어 놓은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신상순 선임기자
최문선 기자가 서울 창전동 ‘사적인 서점’에서 책 처방을 받고 있다. 안전한 낯선 이에게 마음을 털어 놓은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신상순 선임기자

큐레이션 책방의 원조 격인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사적인 서점’. 정지혜(29) 대표가 책을 ‘처방’한다. 책방을 찾아오는 이의 마음을 읽고 주치의처럼 책을 골라 준다. 인터넷 서점의 알고리즘 책 추천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서비스다. ①방문 시간을 예약하고 책 처방 비용 5만원(책값 포함)을 송금한다. ②‘인생의 책 3권’ ‘좋아하는 작가’ 같은 간단한 질문에 답을 적어 보낸다. ③서점을 찾아가 허브티를 마시며 정 대표와 한 시간 동안 대화한다. ④7~10일 뒤 배송되는 책을 읽는다. 정 대표가 손 편지에 써 주는 ‘책 복용법’을 참고한다.

20대인 정 대표가 과연 내 고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정 대표는 “나이를 많이 먹어야 ‘듣는 귀’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출판사 편집자로 시작해 출판계에서 7년 일했고 어릴 때부터 책에 빠져 살았다“며 “대화하면서 떠오르는 책 4, 5권을 다시 또는 새로 읽어 보고 처방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부터 200여명이 사적인 서점을 다녀갔다. 책 고르는 눈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 골라 주는 색다른 책을 읽어 보고 싶은 사람, 책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 그저 대화 상대가 필요한 사람. 여성이 80%이지만 재방문율은 남성이 높다. 자기 얘기를 할 데가 없어서일까. 나이 드는 외로움을 털어 놓은 50대 남성도 있었다. 책 자체보다 책을 매개로 한 위로나 공감을 처방 받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을 봐도 온통 마음을 어루만져준다는 책이니까.

양진하 기자는 “사적인 서점은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양진하 기자는 “사적인 서점은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책 처방 아이디어를 서울국제도서전(6월 14~18일ㆍ코엑스)이 벤치마킹했다. 은유, 백승권, 이권우, 이정모, 서민, 금정연, 김봉석 등 글쓰기와 과학, 장르 문학 분야의 잘 나가는 작가와 저자 21명이 책 주치의로 나선다. 주치의와 1대1로 얼굴을 맞대고 앉아 30분간 대화하고 나면 ‘나만을 위한 책’을 처방 받는다. 처방비가 없는 대신 책은 사 봐야 한다. 신청서를 보내면 작가가 처방해 주고 싶은 사람을 직접 고른다. 신청은 31일까지.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홍민 대표는 “책을 그저 많이 전시해 놓고 싸게 팔고 사는 이벤트로서의 도서전은 수명을 다했다”며 “재미있는 일을 벌여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책 큐레이션이 당분간 출판계 흐름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20대ㆍ40대 기자의 책 처방 체험기

사적인 서점 정지혜 대표가 처방한 책과 함께 보낸 편지.
사적인 서점 정지혜 대표가 처방한 책과 함께 보낸 편지.

정말로 내 마음에 와 닿는 책이 처방될까.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두 명이 사적인 서점을 체험해 봤다.

▦최문선(40대)

“단테가 노래했듯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지 알 길이 없건만’ 18년째 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것도 ‘컴컴한 숲 속’ 같은 신문사. 고민 없는 삶이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무탈하고 잔잔한 삶. 소란도 빚도 없는 대신 떨림도 기대도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 있으려고 책을 읽는다. 인생의 책 3권은 ‘짐 크노프’(미하엘 엔데)‘ ‘먼 북소리’(무라카미 하루키) ‘청춘의 문장들’(김연수). 소설가가 쓴 여행 에세이와 작가의 자서전, 전기를 좋아한다. 멋있는 문장에 집착한다. 도전하고 싶다. 그런데 도전할 대상을 찾는 게 귀찮다.”

사적인 서점의 처방은 ‘다시, 피아노’. 영국 일간지 가디언 편집국장인 앨런 러스브리저가 난곡 중의 난곡인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에 도전하는 얘기다. 아마추어의 도전기, 기자가 쓴 책은 취향이 아니지만 내 마음을 훔쳐본 이가 골라준 책이라는 생각에 꼭꼭 씹으며 읽었다. 책 읽기는 “편집국장이 피아노라니”라는 회의로 시작해 “나도 당장 일자로 다리 찢기를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아름답게 끝났다. “문선님께 작은 용기가 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손 편지에 찔끔 눈물까지 났다. 호로비츠, 크리스티안 짐머만, 조성진의 발라드 1번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건 부록 같은 선물이었다. 사적인 서점에 주고 싶은 별점은 ★★★★★(다섯 개 만점 기준ㆍ☆은 반 개).

▦양진하(20대)

정작 나는 표현하지 못했던 내 심정을 글로 써내려 간 작가들의 문장을 좋아한다. 그래서 평소 한국 작가들이 쓴 에세이를 집어 들 때가 많았다. 만 3년을 갓 채운 직장인은 혼자만을 위한 책이 필요한 순간을 맞이했다. 사적인 서점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과연 나에게 맞는 책을 추천 받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웬걸, 서점 주인과 이야길 하다 보니 속마음까지 불쑥불쑥 잘도 튀어나왔다. “에세이 한 권 펼칠 틈이 없다”는 하소연으로 시작한 ‘사적인 대화’는 “요즘 봄 타나 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혹시나 한 시간 동안 할 말이 없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서점 주인은 이야기를 듣다가 맞장구 쳐주고, 자신의 경험까지 꺼내 ‘나도 이해한다’며 공감해 준다.

그렇게 해서 처방이 내려진 책은 라디오 작가 정현주가 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다.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 김환기와 문필가이자 그의 아내인 김향안의 삶, 사랑, 예술을 담은 책이다. 김환기가 직접 쓰고 그린 편지와 그림이 책의 재료들이다. 마음 편히 두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 서점에서 보내 온 추천 글에 적힌 ‘비 오는 날 부암동 환기미술관을 찾아가 보라’는 문장을 읽고 재방문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점에서 추천해 준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누군가 내 이야길 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 찾아가고 싶은 곳. 별점은 ★★★★☆.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정지혜 대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어쩐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
정지혜 대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어쩐지 사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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