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생 이예진(27)씨는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 아트박스 같은 팬시문구점에 꼭 들른다. 뭐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뭐라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쇼핑노동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는 심심하고 헛헛하기 때문. 주로 사는 것은 스티커나 마스킹 테이프, 공병 용기처럼 자질구레한 문구 내지 생활용품들이다. 세밀하게 잘 써지는 하이테크 펜도 형광 연두색이나 연한 분홍색처럼 실용성 떨어지는 것들까지 두루 ‘컬렉션’ 하고 있다. 본인은 “쓸모도 없는 것들을 막 샀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이 쇼핑노동은 그에게 하루를 마감하는 중요한 제의다. “취미생활요? 아르바이트 끝내고 나면 파김치라 엄두도 못 내요.”
돈 꼭 쓰고 말 테야…‘탕진잼’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부터 옷이나 맛집, 여행 등 여가생활까지 아낌없이 돈을 쓰는 재미를 일러 ‘탕진잼’이라고 한다. 재물 따위를 다 써서 없앤다는 의미의 ‘탕진’과 재미를 뜻하는 ‘잼’을 합쳐 만든 신조어다. 지난해부터 젊은이들 사이에 두루 쓰이기 시작한 탕진잼은 소비나 쇼핑과 관련된 핵심 신조어로 자리잡으며, ‘재미 중에 최고 재미는 탕진잼’, ‘딸기잼보다 맛있는 탕진잼’ 등의 구호를 양산하고 있다. 지폐를 흩뿌리며 점프하는 주인공이 “돈을 쓰고 돌아다니는 건 신나고 재밌는 것 같아!! 탕진잼!”을 외치는 웹툰도 있다. 현이씨가 그린 ‘즐거우리우리네인생’의 이 장면은 ‘탕진잼족’들의 엠블럼이다.
물론 쇼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트레스 해소의 제1 방책이자, 즐거운 유희이며, 치유의 의식이다. 하지만 탕진잼을 외치는 청년 세대에게는 기성세대가 느끼는 모종의 죄책감보다 탕진 행위로 명명한 적극적 소비의 쾌락이 우선한다. ‘어서 돈을 모아 집을 사야 하는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데 돈을 많이 썼을까’ 같은 자책은 일단 저성장ㆍ장기불황 시대의 취업난에 어울리지가 않는다. 어차피 모아봤자 쓸 데도 없는 적은 돈, 소소한 쇼핑을 통해 일상의 치유를 누리는 게 현명하다는 인식이 심리 기저에 깔리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쇼핑이 죽을 힘을 다해 피하려 노력했으나 운명처럼 빠져들고 마는 불륜 같은 것이었다면, 탕진잼의 쇼핑은 타오르는 불길에 자신을 내던지는 세기말의 사랑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SPA 패션 회사에서 일하는 조모(28)씨는 매달 카드값이 월급 250만원에 간당간당하다. 패션피플로서 비싼 옷을 사 입는 것도 아니건만,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SPA 브랜드도 몇 벌 구입하기가 힘들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은 한 달만 지나도 올드하게 느껴져 싹 지워버릴 정도로 트렌드에 민감한 조씨가 친구들과 주로 어울리는 곳은 이태원 해방촌의 힙플레이스들. 저축은 당연히 하지 못한다. 노후가 불안하지는 않을까.
“당장 12월 방콕 휴가가 걱정인데요. 가서 현금을 써야 하는데 이렇게 생활하다가는 여비도 없을 판이거든요.” 결혼 생각이 없다는 조씨는 “굳이 집을 살 이유도 없고, 그냥 이렇게 계속 돈을 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행복할 가능성도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결핍을 견뎌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맡은 파트는 출퇴근도 요일마다 다르고, 출근 시간도 제 각각이어서 동호회처럼 규칙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요. 취미생활을 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때그때 스트레스 풀기엔 쇼핑이 제일 쉽고 빠르죠.”
모아봤자 푼돈, 나날의 향유 위해
인스타그램에 탕진잼이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4,200개가 넘는 게시물이 검색된다. 탕진잼에 앞선 유행어였던 ‘텅장’(텅빈 통장)을 넣으면 게시물은 8,700개가 넘는다. 이들 게시물에 올라온 ‘탕진잼 떼샷’은 사실 ‘탕진’이라는 말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들이다. ‘탕진’ 하면 떠오르는 럭셔리 브랜드의 가방이나 옷, 신발, 보석 같은 사치재들이 아니라 립밤, 헤어 에센스, 핸드로션 같은 소소한 미용용품이나 텀블러, 머그컵, 커피 원두 같은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이다. 샤넬 핸드백에 티파니 반지와 목걸이 세트를 잔뜩 사들이고 “재미 중의 재미는 탕진잼”이라고 써놓았다간 쇄도하는 악성댓글을 피할 길 없다.
“역시 탕진잼이 최고. 오늘의 탕진템 떼샷” 같은 글에 “잘하셨어요”, “득템하셨네요. 내일부터 무지출 하시면 되죠” 같은 응원의 댓글을 받으려면 역시 소소한 생활 아이템들이어야 한다. 탕진잼의 ‘탕진’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은 액수의 돈을 실컷 쓴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어, 탕진잼이란 말 자체가 형용모순인 셈이다. 3만원의 돈을 탕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지만, 청년들에게는 이게 얼마든지 가능한 즐거운 유희다. 소소하게 낭비하면서 극적으로 과장하는 행위가 바로 탕진잼인 것이다.
대학에서 근로 아르바이트 중인 김윤지(가명ㆍ23세)씨는 한 달에 두세 번 인형이나 피규어 같은 귀여운 아이템들을 쇼핑한다. 청소년 때부터 인형을 좋아했지만, 부모님이 탐탁지 않아해 실현하지 못했던 ‘좌절된 욕망’을 대학 와서 자취를 하며 눈치 안 보고 실현하는 중이다. “맥도널드 해피밀의 핀과 제이크 세트가 품절이라 아직 못 사서 우울해요. 인형은 주로 쿠팡이나 위메프 같은 소셜 커머스 아니면 페이스북 간편결제로 사는 편이고요.” 김씨는 “친구들을 못 만나거나 집에 혼자 있을 때 쇼핑몰을 자주 들여다 본다”며 “쇼핑몰 브라우징을 하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참 잘 간다”고 말했다.
모든 건 그렇게 쇼핑이 된다
기성세대에게 생필품이란 지나가다 슈퍼마켓에서 아무거나 집어 든 후 사오면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 해소와 치유의 행위로서의 쇼핑 범주에 들지 않는다. 쇼핑이라면 자고로 오랜 열망의 소산이거나 반드시 갖고 싶은 물건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탕진잼에 빠진 청년들에게는 삶의 모든 물건이 중요한 쇼핑의 영역이다. 샴푸 하나를 사도, 실내용 슬리퍼 하나를 사도, 아무거나 사지 않고 관련 쇼핑정보를 집대성해 원하는 바로 그 물건을 낙점한 후 구매한다. 생활용품점 다이소를 비롯해 올리브영, 왓슨스 등 드럭스토어 형식의 대형 생필품 매장들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이 중에서도 탕진잼의 최고 성지는 다이소. 가책 없는 알뜰한 낭비가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생필품의 주요 구매층은 가정주부일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실제 가장 많이 다이소를 찾는 세대는 20대다. 다이소에 따르면, 20대 고객이 전체의 30%로 가장 많고, 이어 30대 25%, 10대와 40대가 각각 20%다. ‘가성비’가 세상 모든 것의 척도이자 시대정신으로 떠오르면서 구비 상품 80% 이상이 1,000~2,000원인 다이소가 젊은 탕진잼족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다이소 홍보팀의 심수연 대리는 “최근 들어 20, 30대 젊은 남녀들이 주 소비층으로 부상하면서 이들을 겨냥한 문구와 패션, 선물 등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출시한 기획전을 자주 마련하고 있다”며 “적은 비용으로 합리적인 쇼핑을 한 소비자들이 부자가 된 느낌을 받으며 생활의 즐거움과 위로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명 똥퍼프로 불리는 화장도구 조롱박퍼프와 다이소 브러시, 최근 출시된 디즈니시리즈 등이 탕진재머의 사랑을 받는 히트상품들이다.
10여 년 전 유행했던 지름신이라는 용어와 대비해 보면 탕진잼의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인 의미가 두드러진다. 경기호황의 거품 속에서 브랜드와 사치재에 굴복하고 말았던 수동적 지름신의 시대를 지나 바야흐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성비에 근거해 반드시 사들이고 말겠다는 소소한 낭비의 시대에 이르렀다. 탕진잼이라는 말에는 무력한 투항보다 공세적 저항의 기미가 짙다.
시장조사업체 마크로빌 엠브레인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브랜드보다는 기능과 성능, 품질 등의 정보를 따지고 구매해야 인정을 더 받는다”고 답변한 사람이 76.9%나 됐다. “상품 구매시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서비스 내역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답한 꼼꼼한 소비자도 무려 88.4%다. 광고의 홍수와 SNS의 입소문을 통해 소비자 모두가 상품 정보에 해박한 ‘상품비평가’로 거듭나고 있으며, 이는 탕진잼에 빠진 젊은 소비자들일수록 두드러진다. 탕진잼을 누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부지런해야 개이득”이라고 생각하고, SNS를 통해 자신의 ‘탕진잼력’을 평가 받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거 사면 잘 샀다고 소문나겠지?”는 탕진잼의 공리가 된다. 벌 수 있는 돈이 점점 적어진 시대. 티끌처럼 모아봐야 집도, 차도 살 수 없는 현실. 탕진잼은 이들 세대의 서글프지만 합리적인 선택인지도 모른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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