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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연의 목적

입력
2017.07.0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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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관광객들은 제각기 낯선 나라에 대한 소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연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잖아? 집들이 깔끔하고 예뻐서 달라 보이는 거지. 그런데 고속도로가 꽤 한적하네. 도로가 막히기는커녕 오고 가는 차가 거의 없어. 여행안내 책자에는 이 나라 사람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근면’ 이래. 근면한 사람들이 평일에 놀러 다니겠어?

관광객들은 들떠 있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정확한 사실이거나 말거나 이치에 닿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는 출구를 놓치고 말았다. 네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닿으려면 한참 멀리 갔다가 또 그만큼 되돌아와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냥 쭉 가볼까? 지도를 보니, 트리글라브 산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면 우리가 가려던 호수로 갈 수 있어. 뒷좌석에서 지도를 펼쳐 들여다보던 이가 말했다. 그렇지만 네비게이션은 온 길로 되돌아가라고 하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운전대를 잡은 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구경 삼아 그냥 가 보자. 경상북도보다 좁은 나라라고 하니, 어떻게 가도 두 시간 안에 호수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고속도로가 끝나고 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가 현관에서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집들과 푸른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얼룩소들을 지나쳤다. 캠핑장 표지판이 나타나자 차를 멈췄다. 잠시 쉬어갈 요량이었다. 차에서 내린 관광객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자연이 우리나라랑 비슷하다고? 저런 산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어!

산길을 달리는 동안 그들 눈앞에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아직 장년기의 산들답게 가파르고 각진 능선과 굵고 깊게 주름진 산자락들. 빙하 녹은 물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창백하고 푸른 호수. 그늘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며 모여 드는 양떼. 산사태로 한쪽 옆이 무너진 도로를 간신히 통과하는 일조차 설렜다. 가장 높은 고개의 정상에 이르렀을 때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은 왜 자꾸 되돌아가라고 하지? 낯선 아름다움에 홀려 있던 관광객들은 원래 가려던 목적지가 있음을 떠올렸다. 지도상으로는 호수까지 길이 연결되어 있어. 지도를 들여다보던 이가 알려주었다.

평지로 이어지리라 예상했던 길이 다시 산 위로 향했다. 산중턱 갈림길에서 표지판을 만났고, 그들은 기계가 되돌아가라고 재촉한 이유를 깨달았다. 표지판은 호수로 향하는 넓은 도로가 폐쇄되었으니 좁은 산길로 우회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의논 끝에 그들은 우회로로 들어섰다. 자칫 방향을 잘못 틀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은 좁고 가파른 길이었다. 아름다움을 탐닉하던 마음은 어느 덧 사라졌다. 길이 갑자기 끊어지지 않기를, 맞은편에서 불쑥 다른 차가 나타나지 않기를, 너무 일찍 어둠이 내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제라도 돌아갈까? 누군가가 속삭였다. 망설임 끝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이제는 끝까지 갈 수밖에 없어.

숲이 끝나면서 갑자기 시야가 열렸다. 분홍빛 저녁놀이 번진 절벽 끝에 하얀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지나온 마을마다 하나씩 보이던, 특별할 것 없는 예배당이었다. 마지막 햇살이 지붕 위의 십자가와 멀리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회백색 봉우리들을 비추었다. 반드시 드러나야 할 의미를 품은 듯, 풍경은 빛나기 시작했다. 저것 봐. 저걸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런데 우리가 살아 있기는 한 거야? 그 순간 관광객들은 뜻하지 않게 순례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우연과 실수가 이끌고 온 목적지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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