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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거리의 이웃에 대해 놓치는 것들

입력
2017.06.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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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맨체스터 테러 현장에서 시민들을 도운 노숙인 크리스 파커.
영국 맨체스터 테러 현장에서 시민들을 도운 노숙인 크리스 파커.

영국은 올 들어 테러와 전쟁 중이다. 석 달 새 불특정 다수를 노린 테러가 세 차례나 일어났다. 특히 지난달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맨체스터 아레나 테러는 2005년 이후 영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참사라고 한다. 으레 그렇듯 테러 현장의 참혹함을 전하는 소식 건너편에는 피해자들의 애틋한 사연과 그들을 위해 애쓴 평범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기사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 맨체스터에서도 영웅은 탄생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노숙인이다.

맨체스터 거리를 제 집 삼아 살던 30대 청년 크리스 파커는 그날도 구걸을 하러 아레나를 찾았다가 테러를 만났다. 생사가 요동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파커는 죽어가는 한 60대 여성 피해자를 품에 꼭 안은 채 그의 마지막을 온기로 채웠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매체는 단박에 호들갑을 떨며 ‘맨체스터의 성자(聖者)’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럽다. 게으르다. 무책임하다. 삶의 전장에서 모든 걸 포기한 이들에게 덧씌워진 편견이다. 여기 유튜브에서 꽤 인기를 끈 실험 동영상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한 남성 노숙인에게 100달러를 쥐어줬다. 술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는 남자, 그럼 그렇지, 당연히 술을 샀겠거니 낙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진행자. 놀라움은 그 다음이었다. 이 사람은 다른 노숙인들에게 줄 음식을 구입하는 데 돈을 썼다. 알고 지내는 동료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거리를 벗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사가 이어진다. 양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보험 만으로 병원비를 대지 못했고, 아버지를 돌 볼 사람이 없어 일도 그만뒀다. 어머니도 2주 뒤 세상을 등졌다. 집을 팔아야 했고 결국 홈리스가 됐다. 마지막 한 마디. “나태하거나 약물 중독자만 여기 있는 게 아니다.”

마이클 존스는 길 위의 성자 파커를 위한 온라인 모금 운동 사이트를 만들었다. 원래 1,000파운드를 목표로 잡았던 모금액은 한 달도 안돼 무려 5만파운드(7,180만원)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존스는 지금 모금 페이지를 개설한 결정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돈이 이렇게 모였는데도 파커는 아직 거리를 전전한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느냐는 힐난이 쏟아졌다. 존스는 파커가 지낼 만한 적당한 공간을 알아봤지만 그는 한사코 호의를 물리쳤다. 왜 그러는지는 모른다. 그냥 친구들이 있는 곳에 살겠다고 했다.

기부금이 노숙인을 지붕이 있는 집에 데려다 놓고, 또 우리 눈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인식, 거기서부터 잘못됐다. 파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좀 더 섬세하게 다가가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조지 오웰이 거의 100년 전에 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란 책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노숙인의 삶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한 곳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베풂을 노숙인들에게 강요하면서 그들을 도시 내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만든 건 아닐까. 5만파운드를 전부 주더라도 한줌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으면 그 또한 폭력일 수 있다.

노숙인들은 성자로 불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변화는 일시적 감정에 이끌려 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 눈높이를 맞추는 존중과 이해에서 시작된다. 꼭 10년 전 요즘은 널리 알려진 노숙인 인문학 강좌를 취재한 적이 있다. 한끼 밥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기 힘든 인문학이 웬말이냐 싶었다. 하지만 저마다 아픈 사연을 긍정하는 수업 과정을 통해 수강생들은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중년의 한 남성 수강생은 “인문학이 한 줄기 빛처럼 다가섰다”면서 대학에 진학해 반드시 인생 2막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끝끝내 밝히지 않은 꿈을 그가 이뤘는지 몹시 궁금하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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