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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진료 깨기’ 머나먼 의료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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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진료 깨기’ 머나먼 의료 현실

입력
2017.09.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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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급 종합병원 정신과 3곳

의사 1명당 외래환자 하루 최대 91명

대형병원 ‘15분 진료’ 도입 바람 속

짧게 상담할수록 이득 수가체계 문제

한 상급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부 모습.
한 상급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부 모습.

“해도 너무하네요. 정신과 의사가 환자 얼굴도 보지 않고 어떻게 약을 처방해요?” 3년 전 우울증 진단을 받아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는 직장인 강모(40)씨는 지난달 중순 약 처방을 위해 찾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서 의사와 ‘한판’ 붙었다. 담당교수가 여름휴가로 자리를 비워 다른 의사를 예약해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약을 처방했다. 의사가 강씨에게 한 말은 딱 한 마디, “먹던 약을 드리면 되죠?”였다. 진료 시간은 불과 1분 남짓. 강씨가 거칠게 항의하자 의사는 “오늘 외래환자가 많다. 먹던 약 먹으면 괜찮다”며 진료실에서 나가 줄 것을 요청했다. A씨는 “말만 정신과지 약국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화를 참지 못했다.

국내 대형병원에서 ‘3분 진료 깨기’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엔 아직 너무 요원한 진료과목이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다. 그 어떤 병보다 의사와의 소통이 중요하지만, 현실에서는 평균 진료시간이 채 3분을 넘지 못한다. 지나치게 낮은 상담진료 수가 체계, 돈이 안 되면 아무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해도 외면하는 병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급병원에 목을 매는 환자 등이 맞물린 결과다.

6일 한국일보가 ‘빅5’로 분류되는 서울지역 상급종합병원 3곳의 정신과 외래환자수를 취합한 결과, 지난해 기준 A병원은 하루 평균 450명, B병원은 232명, C병원은 227명이었다. 해당 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은 교수ㆍ전공의 등을 포함해 다양하기 때문에 1인당 진료 환자 평균을 내기는 어렵지만, 교수 1명이 하루 최대 진료한 외래환자는 A병원이 70명, B병원 91명, C병원이 60명에 이르렀다. 교수들의 외래진료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최대 8시간 가량인데다 입원환자 회진, 전공의ㆍ의대 실습생 교육, 회의 등 다른 일정도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환자 1명당 배정된 시간은 3분을 넘기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의사들은 정신과 환자의 경우 다른 환자들에 비해 훨씬 심층적인 상담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내시경 등 객관적인 질환 자료가 있는 육체적 질병과 달리 정신과의 경우 충분한 상담을 통해서만 진단과 진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 질환이 과거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던 조현병이다. 조현병 환자는 망상과 환청 증상이 있어 상대방과의 대화를 거부하기 쉽다. 또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다. 익명의 한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는 “조현병 환자의 경우 환자 스스로 증세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짧은 시간에 환자를 진료하는 시스템에서는 상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심층 상담 절실한데… 환자 넘쳐 약 처방으로 1분 만에 끝

초진환자 중 상태가 심각해 자살 가능성이 있는 환자의 상담시간이 길어지는 경우 대기환자들이 크게 항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러다 보니, 대기하던 환자들에게는 평소 복용하는 약을 처방해 서둘러 진료를 마무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급하게 약만 처방하다 보니 심지어 동명이인에게 잘못 처방되는 경우까지 있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지방의 모 대학병원 외래에서 항우울제를 처방 받고 있는 이모(38)씨는 최근 이런 일을 겪었다. 외래진료 후 약을 타기 위해 병원근처 단골약국을 찾은 이씨에게 약사가 “약이 바뀐 것 같다”며 병원에 확인을 요청했다. 병원에 확인한 결과 조현병을 앓고 있는 동명이인에게 처방돼야 할 약이 이씨에게 처방됐다. 이씨는 “의사만 믿고 약을 가져갔으면 3개월간 엉뚱한 약을 먹을 뻔 했다”며 “병원 측에선 구두 사과 외에 아무런 조치도 없더라”고 황당해 했다.

대형병원 정신과가 이렇게 ‘분치기 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수가체계에 있다는 게 병원들의 주장이다. 같은 상담시간이라도 환자 1명을 오래 진료하는 것보다, 여러 명을 짧게 진료하는 것이 훨씬 이익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재 정신과 외래진료는 다른 진료과와 달리 진찰료(접수비)와 상담비(개인정신치료비)로 이원화돼 있다. 그만큼 정신과의 경우 상담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진찰료는 일반 초진의 경우 2만2,200원, 재진은 1만8,000원. 여기에 ▦지지요법 1만1,140원(15분 이내) ▦집중요법 2만1,120원(15~45분 이내) ▦심층분석요법 3만4,560원(45분 이상)으로 구분돼 있는 상담비가 추가되는 구조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대부분 지지요법 환자들의 경우 진료시간이 15분은커녕 3분 내외라는데 있다. 1시간 동안 3분 진료 환자 20명을 보면 진찰료와 상담비를 더한 수가 수입이 초진 기준으로 66만원여원에 달하지만, 심층분석요법 환자 1명을 보는 경우 6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 머릿수를 늘리는 박리다매를 유도하는 체계”라고 입을 모은다. 석정호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는 “정신치료 관련 수가가 너무 낮아 상담은 거의 사라지고 약 처방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가뜩이나 정신과 환자들은 CT나 MRI 등의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심층상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부도 이런 수가체계의 문제를 인정한다. 정통령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장은 “진료시간별 수가 차이가 미미해 짧게 상담을 할수록 이득이 되는 현재의 체계는 문제가 있다“며 “환자를 오래 볼수록 이익을 얻을 수 있게 수가를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환자들의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조현병 환자는 정신과 외래수입에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런 수가체계를 핑계로 사실상 상담진료를 포기하고 약만 처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학병원 정신과 교수는 “조현병 환자는 하루에 100명도 볼 수 있다”며 “환자 상담을 포기한 대학병원의 민낯”이라고 씁쓸해했다. 그는 “하루에 70~80명 정도 환자를 보고 있으면 의사가 아니라 병을 찍는 ‘점쟁이’가 된 느낌”이라며 “내가 일반내과 의사인지, 정신과 의사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굳이 대형병원으로 몰려드는 환자들 역시 ‘3분 진료 깨기’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단순히 약물 치료만으로 해결이 되는 환자들이라면 병ㆍ의원급 작은 병원을 찾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약물치료로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환자들은 대학병원이 아닌 병ㆍ의원급 의료기관을 이용해야 대학병원 외래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정석 건국대충주병원 정신과 교수도 “약 처방과 상담이 필요한 환자들이 지역에서 쉽게 병ㆍ의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환자와 의사가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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