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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1 04:40
수정 : 2017.07.01 16:08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미국을 종교독재국가로 묘사… 트럼프의 퇴행 예언

등록 : 2017.03.11 04:40
수정 : 2017.07.01 16:08

<2>로버트 하인라인이 그린 21세기의 미국

1940년 소설 ‘이대로 간다면’

이민자 차별 정책과 내용 유사

트럼프 당선으로 작품 재평가

‘과학기술 진보=사회 진보’ 거부

이념ㆍ종교서 자유로운 의지 신뢰

대통령 취임 후 미국 중심의 보호무역주의와 배타주의 정책을 연일 선보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6일에는 이슬람권 7개국을 입국금지 대상으로 규제했던 반(反) 이민 행정명령을 다소 완화한 수정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나 여전히 무슬림 입국 금지 조치라는 반발이 일고 있다. 워싱턴DC=EPA 연합뉴스

트럼프 정부의 수정 반(反) 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하버드대 이슬람 단체 회원들이 7일 미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 하버드대 캠퍼스 내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캠브리지=AP 연합뉴스

SF가 현실로 나타난 상황을 작년에 두 번이나 목격했다. 첫 번째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

TV 바둑중계를 보면서 “SF가 라이브로 펼쳐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시간문제일 뿐 SF에서 진작부터 예견했던 것이다. 충격적인 건 두 번째였는데, 바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였다. 도널드 트럼프가 비록 대선 과정에서 상당한 주목을 끌긴 했지만 정말로 당선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설보다 더 허구 같은 일이 정말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로버트 하인라인이라는 SF 작가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그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낡은 것인 줄로만 여겨왔는데 사실은 무섭도록 예리한 통찰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영어문화권에는 ‘빅 3(Big Three)’라고 불리는 세 명의 SF 소설가가 있다. 아서 클라크와 아이작 아시모프, 그리고 로버트 하인라인이다. 클라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아시모프는 ‘로봇 공학의 3원칙’을 담은 소설들로 유명하다. 하인라인은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의 원작소설 등을 쓴 작가인데, 앞의 두 사람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덜 알려진 편이지만 미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문화 아이콘이다.

세 작가 모두 미래 세계에 대해 놀라운 통찰과 전망을 보여주었지만 저마다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 아시모프가 아이디어와 스토리텔링을 결합하는 달인이라면, 클라크는 우주를 향한 동경 그 자체를 이야기로 형상화하는데 특출한 재능이 있다. 그에 비해 하인라인은 미래를 배경으로 강렬한 캐릭터들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이 장기였다. 한 마디로 ‘인간 사회의 탐구’라는 면에서는 독보적인 솜씨를 보여주었다.

‘배타주의 미국’을 예견하다

하인라인의 작품들은 대부분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미래사(future History)’ 시리즈 연작으로 묶인다. 숱한 중ㆍ단편과 장편들이 이 시리즈에 포함되며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겹치는 경우도 많다. 19세기 중반부터 43세기까지 이르는 장대한 연대기이다. 그 중 21세기를 다룬 ‘이대로 간다면(If This Goes On-)’이라는 중편소설이 있는데, 10년쯤 전에 이 작품을 읽고는 하인라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구태의연하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1940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21세기의 미국을 과학기술적으로는 발전했지만 정치적으로 전체주의 종교독재국가로 그리고 있었다. 계몽시대와 모더니즘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해 온 서양의 역사적 발전이 오히려 퇴보한다고 본 것이다. 실제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 이런 전망은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 단지 작가가 스토리텔링의 재미를 위해 안이한 설정을 취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가졌다.

그러나 트럼프의 당선 및 그가 취임 직후부터 거침없이 실행하는 여러 정책과 발언들은 하인라인의 ‘이대로 간다면-’의 분위기와 상당히 흡사하다. 배타적인 이민자 정책, 인종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엿보이는 발언 등등. 하인라인의 미래사 연대기에서는 2012년에 선출된 미국 대통령이 종교 독재자로 탈바꿈하고 미국은 강력한 전체주의 경찰국가가 된다. 트럼프의 행정 명령으로 공항에서 이슬람권 여행자들이 대거 입국 거부되는 사태가 있었는데, 소설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사람이라면 닥치는 대로 혹독한 이단심문을 거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트럼프는 아직 취임초기일 뿐이고 앞으로 그의 공약이 어떻게 실현될지 미지수지만, 이전의 정치지도자들에 비해 그렇듯 노골적인 편집 성향을 보인 예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공화당의 보수 강경파 중에서도 가장 심하다.

21세기 미국을 종교독재국가로 묘사한 로버트 하인라인의 중편 '이대로 간다면(If This Goes On)'은 1940년 2월 SF 잡지 'Astounding Science Fiction'(표지 사진)애 처음 발표됐다. 위키미디어

사회는 진보하지 않는다, 적응할 뿐

엄밀히 따지자면 하인라인의 이러한 전망은 미래 예측이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비록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처럼 본격적인 디스토피아문학으로 평가하기에는 통속성의 비중이 크지만. 그보다 하인라인의 작품은 사회적 ‘진화’의 개념을 제대로 깨닫게 해 준다는 미덕이 크다. 다윈이 제창한 진화라는 개념은 흔히 더 나은 쪽으로의 일관된 변화라는 긍정적 방향성을 지닌 것으로 오도되곤 했다. 그러나 사실 진화란 시시각각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할 뿐 발전이나 개선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사회와 역사의 진화도 민주주의나 휴머니즘이 확대되는 과정이 아니라 단지 시대마다 다른 정치경제적 환경에 최적화되려는 변화일 뿐이라고 하인라인은 말한다.

하인라인의 이러한 세계관은 그 자신의 이력에서 배태되었다. 1907년생인 그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축함에서 복무한 직업 군인이었지만 건강 문제로 20대 후반에 전역해야 했다. 그리고는 작가가 되기 전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그 중에는 정치인으로서 활동한 이력도 있다. 저명한 저술가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업튼 싱클레어가 1934년에 민주당 후보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출마했을 때 그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고, 그 자신도 캘리포니아 주의원 출마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광산이나 부동산 같은 사업에도 손을 댄 적이 있다. 그러다가 30대 초반에 처음 단편소설을 판매한 뒤로는 계속 성공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는데, 그 이전의 다양한 경험들이 소설 속 캐릭터들을 풍성하게 장식한 바탕이 되었다. 즉 그는 처음부터 인간과 사회를 불규칙한 역동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했던 것이다.

‘사회학적 SF’가 시사하는 바

오늘날 하인라인은 미국 자유주의의 형성에 어느 정도 문화적 지분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는 흔히 자유주의(Liberalism)와 보수주의(Conservatism)를 혼동하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가치관이다. 자유주의자로서 하인라인은 정부나 종교의 간섭이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방종과는 구별되는 윤리도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대표작인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1966)이나 ‘낯선 땅 이방인’(1961)에 잘 드러난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지구에서 독립하려는 달의 이야기이다. 달 식민지는 지구의 도움이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한 곳이지만 지구의 일방적인 지배와 착취를 거부하고 독립 전쟁을 벌인다. 이 작품에 묘사된 달 식민지의 모습과 ‘낯선 땅 이방인’의 주인공 캐릭터는 1960년대 히피 사회에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낯선 땅 이방인’은 화성인들에 의해 양육된 주인공이 지구에 돌아와서 벌이는 행적을 묘사한 것인데 마치 예수와도 같은 선지자적 아우라를 발산하여 당시 히피족들 사이에 경전처럼 애독되었던 작품이다.

’1997년 개봉된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의 한 장면. 로버트 하인라인의 원작 소설은 ‘밀리터리 SF’의 고전으로 통한다. 브에나비스타 제공

이와는 달리 ‘스타십 트루퍼스’(1959)는 하인라인 작품 세계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1997년 영화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은 노골적인 군국주의 찬양가로 읽힐 수 있는 소설이다. 작중 묘사되는 국가도 극우 파시스트 체제여서 발표 당시 항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인라인은 이런 체제를 옹호하기보다는 외계인과 우주전쟁을 벌이는 나라라면 군국주의 형태가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해서 그런 묘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얘기했듯이 전쟁 상황이라는 환경에 적응한 사회적 진화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 소설은 ‘밀리터리 SF’의 시조이자 훗날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 차용하게 되는 ‘강화 전투장갑복’을 처음 등장시킨 작품으로도 기억된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 사회의 진보로 직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한 작가였다. 어떠한 이념이나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운 의지가 최선이라고 믿었지만, 그런 세상이 순조롭게 실현된다는 낙관론을 펼치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 국면으로 어지러운 지금의 한국 상황 못지않게 트럼프의 미국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걱정스러운 이 시기에, 하인라인의 통찰이 담긴 여러 소설들은 ‘사회학적 SF’로서 우리에게도 적잖은 참고가 될 것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로버트 A. 하인라인

1907년 7월 7일~1988년 5월 8일. 미국의 과학소설가. 6대째 미국에서 살아 온 독실한 기독교 신앙의 독일계 집안에서 성장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직업 군인의 길을 꿈꾸었으나 건강 문제로 조기 전역한 뒤 30대 초반에 작가로 데뷔했다. 개인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우익 자유주의 이념을 작품에 강하게 투영하여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한편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대표작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스타십 트루퍼스’ 등이 있으며 4번의 휴고상을 수상했다.

<소개된 책>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황금가지 발행

스타십 트루퍼스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김상훈 옮김

황금가지 발행

낯선 땅 이방인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장호연 옮김

마티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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