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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패자(覇者)와 완장의 나라

입력
2016.03.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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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결코 인정 않겠다”

드러난 ‘100% 대한민국’ 실체

반대파만 아닌 상식까지 짓밟아

한국일보닷컴에 총선용 가벼운 볼거리로 띄운 역대 선거 캠페인송 동영상을 재생해 보다 ‘박근혜 MOVE’란 노래에 시선이 멈췄다. ‘넌 아직 박근혜 몰라, 얼마나 잘 해내는지~ 네가 쉽게 볼 여자가 아닌걸~ (…) 넌 정말 몰라~ 한참을 몰라~’ 쿵짝쿵짝 신나는 반주에 날아갈 듯 발랄한 목소리에 실린 가사건만 간담이 서늘해졌다. ‘너’란 주어에 누구를 대입해 보든 그때나 지금이나 박 대통령을 감히 ‘쉽게 볼’ 사람이야 있을까마는, 참 많은 ‘너’들이 그의 깊은 속내와 뒤끝을 정말, 한참을, 몰랐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난 3년 간 박 대통령이 얽힌 정치적 사건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일이 기어코 현실이 되는 광경을 수없이 목도했다. 지금 집권여당 안에서 벌어진 ‘공천 활극’은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에게 맞선 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섬뜩한 부제를 달고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을 비롯한 친박계가 크고 작은 배역을 맡았지만, 추정 어법을 동원해 에둘러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하기도 민망한 형국이다.

상상 이상의 막장드라마에 보수 언론들조차 매서운 질타를 쏟아내고 있다. 하나 냉정히 따져보면 일찍이 징조가 없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국민을 편가르거나 선동하지 않고 100%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그런 건설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공언했다. 사회통합에의 강한 의지로 그럴싸하게 해석됐지만 주지하다시피 실상은 달랐다.

박 대통령에겐 공약 파기부터 국회의 개혁입법 논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을 편가르거나 선동”하는 행위의 주어가 늘 ‘너’였고 ‘너’여야만 했다. 그 동안 야당과 진보좌파 등의 몫이었던 ‘너’가 이제는 집권여당 내 반대파에게까지 확대됐을 뿐이다. 100% 대한민국! 에누리 없이 완결된 숫자로 표현됐던 저 구호는 그게 누구든 다름 혹은 다를 수 있음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선언이었던 셈이다.

잊고 있던 일화가 떠오른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에서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웠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혼외자 논란을 빌미로 기어이 찍어낸 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황교안 총리의 동반 퇴진론이 비등하던 때였다. 그를 아는 한 법조인은 사석에서 “황 장관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라고 전했다. 당사자의 속내를 알 길은 없으나 청와대의 뜻을 거스르고 ‘자진사퇴’를 입밖에 냈다가는 가차없이 내쳐지고 이후 삶조차 위태로울 거라 여길 만하다는 데 동석자들 모두 공감했다. 눈 질끈 감고 수모와 고뇌를 견뎠던 그의 선택이 결국 옳았다. 살아남아 총리에 올랐으니.

기초연금 공약 파기에 반발해 장관직을 던졌던 ‘원조 친박’ 진영 의원은 결국 “쓰라린 보복”의 칼날을 맞고 당을 떠났다.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감행한다면 이미 붙은 배신자 딱지의 색깔만 더 짙어질 것이다. 유승민 의원은 ‘자진 탈당은 않겠으니 차라리 자르라’고 버티고 있지만, 고립무원의 TK 전장에서 정치적 생명을 이어갈 묘수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 누군가를 대신해 칼춤을 추고 있는 이들도 속내는 편치 않을 것이다. 주군을 믿든 두려워하든 언제까지고 ‘너’가 아닐 거라고 누가 자신하겠는가.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의 위대한 경연이 우리에게 안겨준 충격과 감격,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한낮의 꿈처럼 날려버린 핏빛 막장극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면 콘크리트 지지층이 결집하고 보수 언론들의 물밑 지원이 위력을 발휘할 거라고, 설사 안방에서 몇 석쯤 잃더라도 굳건해진 ‘당 정체성’을 기반으로 총선 이후 대선까지 나아가 퇴임 이후 정치판도까지 틀어쥘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 터이다. 패자(覇者)와 그의 완장들이 솎아내고 죽인 건 한때 동지였던 내부의 적만이 아니다. 정치를, 민주주의를, 상식을 짓이겼다. 시일야방성대곡! 정말, 한참을, 몰랐다. 나 같은 범인(凡人)처럼 그분은 상식과 인간의 품격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걸.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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