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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리의 마술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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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리의 마술사 입니다"

입력
2017.04.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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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선수 도전 실패... 재미로 하던 마술에 빠져

기획사 '행사기계'ㆍ대학 마술학과 폐지에 또 좌절

인사동 거리공연으로 꿈 키워 "스페인 마술유학 갈래요"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준표 마술사. 김진주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준표 마술사. 김진주 기자

지난 주말 서울 인사동 거리 한복판에서 한 청년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현란한 손동작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눈은 그의 손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고, 연신 탄식을 쏟아내는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술쇼에 집중했다. 약 15분간 진행된 쇼가 얼추 마무리돼갈 때쯤엔 20~30명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흥이 절정에 달할 때쯤 잠시 쇼를 멈춘 그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제가 몇 살로 보이세요?” 우물쭈물하던 한 아이가 “삼십살?”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오늘은 답이 참 후하네요”하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김준표라고 하고요, 21살이에요. 와, 오, 이야, 설마. 다들 이런 눈빛이시네요(웃음). 마술사가 되고 싶어 국내에 2개 있는, 마술학과가 있는 대학에 입학했는데 얼마 전 제가 다니던 대학의 마술학과가 없어졌어요. 갈 곳을 잃었단 생각에 눈 앞이 깜깜했죠. 하지만 마술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 공연에 만족하셨다면 작은 성의만 표해주세요. 저는 여러분의 성의를 발판 삼아 더 좋은 마술사가 되기 위해 해외로 나가려 합니다. 더 흥미로운 마술을 배워, 더 가까이 다가갈게요. 고맙습니다.”

길거리 마술사 김준표씨가 서울 인사동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에 둘러싸여 마술쇼를 하고 있다. 김준표씨 제공
길거리 마술사 김준표씨가 서울 인사동에서 지나가던 행인들에 둘러싸여 마술쇼를 하고 있다. 김준표씨 제공

수영선수가 마술사를 꿈꾸기까지

김준표씨가 마술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 다니던 영어학원에서였다. 김씨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종이가 움직이는 마술을 보여줬는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눈감고도 할 수 있는 마술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싶을 정도로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유튜브로 동영상을 보며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만해도 마술사가 되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없었다. 그저 형과 깔깔 웃으며 서로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정도였다.

그런 김씨에게 마술이 깊숙이 다가온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김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1 때까지 촉망 받는 수영선수였다. 전국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전국대회에서부터 1등과의 키 차이가 무려 12㎝까지 벌어지는 등 신체적인 조건이 따라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수영을 그만둬야 했다. “아무리 빨라도 장신을 따라잡을 수는 없더라고요. 그 때 제가 2등 했는데 1등과의 키 차이를 듣고 ‘아, 이제 안 되겠구나’ 했어요.” 수영을 그만두고 우울했던 김씨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든 것이 바로 ‘마술’이다. 김씨는 재미로 하던 마술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고, “마술을 보다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고1 때 기획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걸까. 기획사에만 들어가면 바로 마술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의 기대는 금방 산산조각 났다. 기획사는 그를 ‘마술사’가 아닌 ‘행사기계’로 만들었다. 6개월간 중소기업이나 교회 등이 주최하는 행사에 수없이 불려갔지만, 그의 수입은 고작 2만원에 불과했다. 수입은 둘째 치고라도 고차원적인 마술을 배울 수 없다는 점이 그를 더 힘들게 했다. “행사에 쓰이는 단순한 마술만 간단하게 알려주고, 다른 마술을 연마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마술보다 해야 하는 마술만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서서히 지쳐갔고,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기획사를 뛰쳐나왔죠.”

나는 길거리 마술사 입니다

거리로 나온 김씨가 향한 곳은 인사동이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족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마술사와 다시 연락이 닿은 김씨는 그가 소개해준 자리에서 18살 때부터 길거리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을 보러 몰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주변 상점 사람들도 김씨에게 “고맙다”라며 음료를 건넬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자신감이 붙으면서 10분짜리 짜깁기에 불과했던 공연도 30분짜리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으로 재탄생 했다. “하루에 8~9회씩 일주일에 4번, 그렇게 1년간 1,660여회 정도 했어요. 정말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했어요. 마술사가 되겠다는 걸 반대했던 부모님이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쯤이죠.”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김씨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길거리 공연자들과 노점상까지 들어선 게 화근이었다. 노점상에 손님을 뺏긴 기존 상인들이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한 것. “쫓아내도 계속 오니까 경찰을 부르기도 했어요. 분위기가 급격히 안 좋아졌죠.” 결국 지난해부터는 아예 인사동 중심거리에서는 기존 상인 외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옮겼지만, 지금도 여전히 김씨의 공연에 굳이 찾아와 “너 때문에 장사 망했다”라며 삿대질을 하거나, 영업에 방해가 된다며 경찰에 신고해 공연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실외 공연을 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난관들도 수두룩했다. 바람이 부는 날엔 모자가 날아가기 일쑤였고, 눈·비가 오는 날엔 카드 등 소품이 젖어 속수무책으로 공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기온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졌는데, 공연 도중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제 손에 물을 쏟은 거에요. 그냥 쓱쓱 닦고 했는데, 어느 순간 손에 감각이 없더라고요. ‘왜 이러지?’ 했는데 손에 고드름이 얼어있었어요. 마술사는 손이 정말 중요한데 정말 당황했죠.” 반대로 여름엔 땡볕에서 쇼를 하다 탈수 증상이 온 적도 있다. “쇼를 할 때는 항상 소매가 긴 옷을 입어야 하는데, 땡볕에서 검정색 긴소매 재킷을 입고 반나절 동안 쇼를 했더니 갑자기 어지럼증이 오더라고요. 다리에 힘도 풀리고. 보다 못한 관객 한 분이 제 재킷을 벗겨서 옷을 비틀었는데 땀이 한 바가지 나왔어요.”

길거리 마술사 김준표씨가 지난해 말레이시아의 한 놀이공원에서 야외 마술쇼를 하고 있는 모습. 김준표씨 제공
길거리 마술사 김준표씨가 지난해 말레이시아의 한 놀이공원에서 야외 마술쇼를 하고 있는 모습. 김준표씨 제공

한국에서 마술사를 꿈꾼다는 것

마술사가 되는 걸 인정해주는 대신 부모님이 내건 ‘대학진학’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김씨는 동부산대학교 마술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면 보다 전문적인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학비는 대학입학을 결정한 고3 초부터 공연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마련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실망스러웠다. “마술학과에 입학한 20명 남짓의 학생 중 정말 마술사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2~3명 정도밖에 없었어요. 대부분은 수능 점수에 맞춰 온 터라 마술에 관심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학습분위기도 어수선했죠. 어떤 교수는 수 년째 같은 내용만 가르쳐 ‘딱 봐도 오래된 마술’만 알려줬고, 학교 시설은 너무 낡아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배워보려 했지만, 학교는 그 해 갑작스럽게 마술학과 폐지를 공지했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라고요. 앞이 깜깜했죠. 그나마 마술학과 있는 두 개 대학 중 나은 곳을 택했던 거라 이거라도 붙잡아보려 했는데… “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김씨는 첫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뒀다. “한국에서 마술사를 꿈꾼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전문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길도 없죠. 변호사, 판사, 의사처럼 ‘사(士)’자 들어가는 직업이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죠. 마술사를 양성하는 학원이나 기획사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마술사를 ‘행사용으로 부려먹기 좋은 존재’라 생각할 뿐, ‘진짜 마술사’로 키워주지 않아요. 반면 해외에서는 마술사에 대한 대우도 좋고, 진짜 마술사를 키우려는 아카데미도 많아요. 제가 가려는 스페인이 대표적이죠.”

김씨는 현재 길거리공연을 통해 스페인 유학 자금을 모으고 있다. 올해나 내년쯤 군에 입대 할 계획인데, 입대 후에는 영리활동을 할 수 없어 그 기간 동안 마술의 학문적인 부분을 공부할 계획이다. “스페인에 가기 전까진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스페인에 가서는 새로운 마술을 익히고 개발하는 데 집중할 거에요.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뻔한 마술 대신, 김준표 마술사의 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하고, 다양한, 그리고 상상 이상의 마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거든요.” 김씨는 새로운 마술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만큼이나 국내 마술교육의 인프라 확충에도 관심이 많다. “언젠가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마술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마술을 가르쳐주고, 한 발 더 나아가 국내 마술시장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마술사가 되고 싶어요.”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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