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5개월 차 하모(28)씨는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마주칠 때마다 “배 많이 나왔네” 하면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아가야” 부르며 손으로 가볍게 튕기는 걸 인사인양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는 “나쁜 뜻이 담긴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누군가 손을 뻗으면 다른 일이 생긴 척 자리를 피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만지지 못하게 막게 된다“며 “거기다가 모르는 사람들이 팔뚝이나 허리 등을 주무르면서 ‘살이 쪘네, 안 쪘네’이라는 말을 건넬 때면 기분이 상하는 게 사실”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임신부 5명 중 1명 “모르는 사람이 불쑥 배 만져”
임신부들이 ‘자신의 배를 향한 무례한 손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티 나지 않게 가리고 다닐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배를 향해 손을 뻗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정색하며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게 이들의 하소연. “‘내 배는, 그 속에 아이는 소중하다는 ‘임신부 배에 관한 권리장전’이라도 만들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일보 취재팀이 지난 10일부터 일주일간 예비엄마와 엄마들이 주로 찾는 커뮤니티 등을 통해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을 한 결과, 하씨의 고민은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본인 동의 없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배를 만진 적이 있냐’는 질문에 ‘가족(친족 포함)이 만졌다’ 혹은 ‘지인이 만졌다’고 답한 사람이 각 324명(64.6%), 242명(48.4%)이나 됐다. ‘모르는 사람이 만졌다’는 답도 107명(21.4%), 5명 중 1명 꼴이었다.
무엇보다 응답자 과반수는 ‘동의 없는 신체접촉’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걸로 나타났다. 모르는 사람일수록 불쾌함은 커져, ‘모르는 사람이 만졌다’고 답한 107명 가운데 78명(72.9%)이 ‘기분이 매우 나빴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고 한 21명(19.6%)까지 더한다면 무려 10명 중 9명(92.5%)이 ‘기분이 상했다’고 답을 한 셈이다. 그나마 가족의 경우, 해당 비율은 크게 줄었으나 그 역시 과반수 이상(50.9%)이 ‘기분 나빴다’고 했다. 임신 4개월째인 김모(34)씨는 “(시부모들께서) 만날 때마다 배를 만지면서 ‘언제 나오나’ 하신다”며 “고민하다 ‘만지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가 ‘예뻐서 만지는 건데 섭섭하다’고 하셔 분위기만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임신부 배는 ‘만져도 되는’ 배?
이들은 “제발 우리 배를 ‘공공재’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잘라 말한다. 다음달 출산을 앞둔 한모(30)씨 역시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배 쪽으로 손이 ‘쑥’ 들어오기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를 돌아본 적이 있다” 며 “한 아주머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과를 하기는커녕 ‘산모가 많이 예민하네’라고 하더라”고 했다. 지난해 출산한 김모(32)씨는 “임신하지 않은 여자들의 배에 손을 대는 건 굉장히 ‘무례한 일’ 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면서 “그런데도 임신한 사람 배는 ‘만져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만져봐도 돼요?’ 했을 때 ‘만지세요’라고 답하기도 어색하고, ‘만지지 마세요’라고 하면 괜히 ‘(임신을 이유로) 유세 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32세 김모씨)는 이유에서다. 물론 “임신한 모습이 예뻐서” “아이를 가진 게 신기해서” 배를 만졌던 사람들은 ‘억울하다’ ‘야박하다’고 항변한다. “임신한 게 벼슬이냐”면서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4개월 뒤 출산하는 며느리를 둔 김모(58)씨는 “임신으로 힘들어하는 며느리를 보면서 딱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다독인다는 마음으로 만지곤 하는데, ‘가족끼리라도 만지지 말라’고 하면 굉장히 섭섭할 것”이라 말했다.
“임신이 벼슬은 아니지만, 모욕이나 간섭은 제발 그만”
임산부 배에 대한 관심은 간섭으로도 이어지기도 한다. ‘살을 빼라’ ‘배가 크면 안 좋다’는 식의 조언이 쏟아지고, 심지어 “D라인(배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부위에는 살이 찌지 않는 것)이 유행이라며 강요하는 사람도 많다”(34세 김모씨)는 얘기도 나온다. 본보 설문에서도 임산부 500명 중 131명(26.2%)은 “D라인을 강요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4명 중 1명 꼴로, 대다수(93.1%)는 ‘기분이 나빴다’고 답변했다.
대중교통의 임산부 배려좌석에 앉았다가, 심지어는 길거리를 가고 있다가도 불편한 시선이나 언사를 경험했다는 이들도 많았다. ‘임산부 전용좌석에 앉아본 적 있다’고 답한 302명 중 ‘앉았다가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무려 38.7%(117명)에 달했다. 이들은 “임신 초기라서 배가 나오지 않아 임신한 티가 나지 않으니 ‘젊은 것들이’라며 눈치를 주는 사람도 있다”고 호소했다. ‘길거리에서 불편한 시선이나 모욕을 당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110명(22%). “배가 산만큼 나와서 왜 돌아다니냐” “배 나온 주제에 달라붙는 옷을 입는다”는 말은 물론, “(나를 상대로) 성적인 농담을 했다”는 임산부도 있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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