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영문표현 해석 달라 신경전
'이중해석 가능한 합의' 의혹도
일본 산업시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일 간 절충이 하루 만에 어그러졌다. ‘강제 노역(forced to work)’ 표현을 놓고 일본 측이 강제성을 인정한 게 아니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한국 외교부의 설명과 간극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소송 방어 차원의 일본 측 물타기 시도로 보이나, 처음부터 한일 외교당국이 ‘이중해석’이 가능한 합의를 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5일 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 직후 도쿄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 대표 발언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6일 전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강제로 노역했다’는 일본 대표 발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하게 됐다’로 번역했다고 전했다.
앞서 사토 구니 주유네스코 일본대사는 독일 본에서 진행된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WHC) 회의에서 “일본은 1940년대에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로 노역했다”고 발언했고, 등재 결정문 주석 형태로 이 발언은 첨부됐다. 외교부는 사토 대사 발언 직후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자기 의사에 반해 노역했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사실상 최초로 국제사회 앞에서 공식 언급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일본 측이 조선인 징용 강제성을 부인하면서 한일 합의 의미가 퇴색되게 생겼다. 정부 당국자는 6일 “WHC 의장도 영문이 정본이라 했고 한일 협의 때도 영문으로 했다”며 “일본 측 기자회견에 일일이 코멘트할 필요는 없고 강제노역은 그 뜻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고 반박했다. 일본 측의 다른 해석은 국내정치 필요성에 기인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괘념치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외교부는 또 ‘본인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가혹한 조건 하에서(under harsh conditions)’ 등의 표현이 강제노역 문구와 함께 담겼기 때문에 일본 측이 노역 강제성 자체를 인정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국제법적으로 국제노동기구(ILO) 자료, 1944년 뉘렌베르크 전범 재판 등에서 이 같은 표현들이 이미 강제노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일본 측 후속 설명은 억지스럽다는 반박도 있다.
하지만 지난달 이후 한 달 이상 한일 협상 끝에 나온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인 만큼 처음부터 양국이 외교적으로 이중해석 가능한 문구로 절충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은 강제노역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일이란 뜻의 ‘work’보다 노동의 의미가 강한 ‘labor’란 단어를 처음엔 주장했으나 일본 측 입장을 수용해 ‘work’로 합의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일본 대표의 5일 발언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의 징용 정책 시행’, ‘정보센터 설치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 모두 “취할 준비가 돼 있다”는 강제성 없는 표현으로 정리됐는데도 한국 정부가 용인하고 넘어간 대목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등재 결정 직후 “금번 문제가 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된 것을 계기로 한일 양국이 선순환적 관계 발전을 도모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먼저 장밋빛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한일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외교부가 세계유산 등재 외교전에서 모호한 표현의 합의로 미봉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정상원기자 orno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