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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눈 오는 밤

입력
2016.12.1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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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머리를 식히려고 창을 열었더니 펑펑 눈이 내린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세상을 제법 하얗게 덮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살짝 마음이 들뜬다. 몇 시쯤일까, 아마 황동규 시인이 ‘화초들이 식물 그만두고 훌쩍 동물로 뛰어드는 찰나’라고 표현했던 새벽 두어 시 어름일 듯하다. 겨울 동안의 내 작업실에는 시계가 없다. 찬 소주 한 잔이 간절한 시간이지만 눈발을 뚫고 술을 사러 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하릴없이 냉기로 몸이 떨려올 때까지 창문을 열고 내리는 눈발만 바라보다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다.

농사가 끝난 겨울이면 나는 밤낮을 바꾸어서 산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으로는 역시 아무 방해를 받지 않는 밤 시간이 좋다. 쓰던 글을 마주하고 다시 고민에 들어간다. 주인공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아무래도 작위적인 느낌이 들어 이야기를 바꾸어보려는데 영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다.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하면 십중팔구 실패가 되는 게 소설이다. 그래서 소설가들에게 우연은 거의 금기의 언어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우연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드라마 속에서 우연이 거듭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이 드라마로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보고자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창을 열었다.

여전히 눈발이 퍼붓고 있었다. 우연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결코 소설에서는 써먹지 못할 어느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일 년 만에 보는 푸짐한 눈발에 설핏 감상적이 되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쉰 고개를 넘긴 사내의 주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데 눈발을 보며 떠오른 기억은 먼먼 첫사랑이었다. 고3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대학 시험을 마치고 자취방에서 친구들과 소주를 홀짝이던 그때, 나는 첫사랑이던 한 여학생과 사귀기 시작하여 열병 비슷한 것을 앓고 있었다. 우리는 빵집이나 음악감상실 따위에서 만나 아직 가보지 못한 풋풋한 연인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보통 두어 주일에 한 차례 정도 만나다가 대학 시험을 앞두고 몇 달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 애가 달았고 약속한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을 며칠 앞둔 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드물게 보는 함박눈이었다. 감성이 최고조에 달한 나이였던 나는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눈을 맞으며 그녀의 집을 향해 걸었다. 이십 리가 넘는 먼 길이었다. 전화도 없었고 그녀의 집에 당도한들, 완고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대문을 밤늦은 시간에 두드릴 용기도 물론 없었다. 다만 이 세상에서 눈을 맞으며 할 일이란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절박한 마음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이윽고 도착한 그녀의 집 앞에는 인적 없는 골목에 가로등만 하나 켜져 있었다. 불빛 사이로 눈은 쏟아지고 나는 그대로 눈사람이 되어 서 있었다. 몇 번이나 용기를 내어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내 첫사랑은 나보다 두 살 아래인 고등학교 일학년이었고 집에서는 어리기만 한 막내딸이었으므로 내가 용기를 내는 순간 적지 않은 풍파가 일어날 것이라는 걸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로등에 기대어 삼십 분쯤 서 있었나 보다. 마음이 가라앉고 젖은 발이 시려 올 때쯤 나는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막 돌아서는 순간, 놀랍게도 스르르 대문이 열렸다. 더욱 놀랍게도 대문 밖을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녀 역시 크게 놀랐고 얼굴에는 금세 옅은 홍조가 피어났다. 급하게 가게에 갈 일이 있어 나왔다는 그녀와의 만남은 짧았고 돌아오는 길은 멀었지만 그것은 내 인생에서 겪은 가장 아름다운 우연의 순간이었다.

시간은 오직 미지로 우리를 이끌고, 많은 일이 그러했듯이 내 첫사랑도 말 그대로 첫사랑이 되었다. 여전히 창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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