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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소한 불행을 소원하는 마음

입력
2016.10.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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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는 맑은 하늘이 가득 차있다. 표정을 바꾼 거리에는 순한 바람이 가득 차있고, 그 바람 비껴 지나는 나무들 사이엔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차있다. 쉬지 않고 일했는데 곳간은 비어 있고 추수할 열매도 별로 없지만 가을이다.

지금은 그만둔 회사 근처, 점심시간에 자주 가던 길모퉁이 칼국숫집은 그대로 있을까. 매일 보면서도 쪽지를 적어 살짝 책상에 올려두던 여고 시절 단짝은 어디 살고 있을까. 어릴 때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무서운 옆집 할머니는 아마 돌아가셨겠지. 계절 탓인지 정처 없는 상념이 꼬리를 문다. 궁금한 안부와 보고 싶은 얼굴들, 부르고 싶은 이름들과 그리운 장소들이 시월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나이가 드니 사는 게 어렵고 두렵다. 복권 당첨이나 세계일주 같은 행운 대신 ‘오늘도 무사히’를 바란다. 차라리 날마다 작은 불행을 가지게 되길 빌게 되었다. 자동차 열쇠를 잃어버린다든지 책상 모서리에 무릎을 부딪친다든지 출근 버스를 놓친다든지 하는 사소한 불행. 그까짓 것, 하며 금방 툭툭 털고 잊을 수 있는 조그만 불행. 갑자기 날아드는 해고통지나 불치병 선고를 대신해줄 안전한 불행. 사는 집의 전세가 1년 사이에 1억원이 넘게 오르거나 석 달 일한 대가를 떼이는 일을 방지해 줄 해결 가능한 불행. 농사짓다 물대포에 맞아 사망하거나 수학여행 가다 바다에 묻히는 기막힌 참사를 막아줄 억울하지 않은 불행…. 바보 같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견딜만한 따스한 불행을 빈다.

하지만 작은 불행과 상관없이 큰 불행은 일어난다. 이 땅에 사는 한은 지금은 내 차례가 아니지만 다음엔 내 일이, 내 자식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나라에 사는 일이 무섭고 엄마로 버티는 일이 힘겹다. 높은 분들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중동이나 동남아로 떠나라고 해야 할까 보다.

어떻게 해야 억울하고 부당한 불행을 피할 수 있을까. 우연히 클릭해 본 한 게임 광고에서 반짝, 답을 보았다. 광고에는 중3이나 고1쯤으로 보이는 4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광고 속의 소년들은 지루한 50분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함께 장난을 친다. 농구를 하고, 야한 사진을 보고, 여학생의 시선을 끌기 위해 춤을 추고, 거리를 달린다. 모두 함께한다. 심지어 함께 서서 소변을 보고, 지하철에서 함께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이 흐른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50분과 /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쓸데없는 몸부림과 / 대부분 의미 없는 그 패기나 / 이유 없이 흥분되는 순간과 / 갑자기 찾아오는 냉정함도 / 출구가 없는 불안함이나 / 전부 함께 웃고 소리치고 / 수많은 시시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 하자. / 함께라면 그 모든 것에 반드시 의미가 있다. / (자막) 힘을 합쳐, 돌진하자.”

2015년 기준, 세계적으로 3,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한 일본 모바일 게임 ‘몬스터 스트라이크’의 TV 광도다. 위치추적장치(GPS)를 활용하여 실시간 4인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다는 게임의 특징을 뭐든 같이 하는 4명의 소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넷이 같이 게임을 하는 장면은 무심히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다. 마음을 울리는 카피가 게임 광고를 한 편의 감동적인 인생 드라마로 승화하고 있다.

‘아 게임광고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하는 감탄이 먼저 오고, 뒤를 이어 ‘‘함께’가 답일 수 있겠구나’하는 각성이 들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부조리한 시절을, 상위 1%의 눈에는 부질없고 시시한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함께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찾으면 된다. 애써 외면했을 뿐이지 큰 불행과 불의를 막기 위해 이미 앞서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주변에 흔하다. 작고 사소한 불행이라도, 막을 수 있는 불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함께 행복하고 싶다.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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