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트라우마 전국으로 확산
어지럼증ㆍ불면증 환자 줄이어
태풍ㆍ홍수와 달리 생소한 재난
대처법 막연해 두려움 더 느껴
대피 가방ㆍ매뉴얼 등 자구책 마련도
대지진 공포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지난 12일 국내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인 경주 5.8지진이 발생한 데 이어 19일 밤 규모 4.5인 지진이 발생하자 시민들의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지진 발생지인 경북 경주와 인근 경남ㆍ북 주민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우리나라가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경주 주민들은 사실상 패닉 상태다. 동국대 경주병원 등 지역 의료기관에서는 12일 이후 어지럼증, 멀미, 불면증 등을 호소하는 환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많은 주민들이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밤잠을 설친다”는 증상을 호소하고 있다. 지진이 발생한 내남면 부지리 주민 최모(72)씨는 “낮에는 여진이 나도 잘 못 느끼는데 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규모 2.0 안팎 여진도 마치 천둥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여진이 없는 날에도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다가 잠이 깬 적도 있다”고 말했다.
수능(11월17일)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경북 포항 지역에서 수험생들의 초조함과 불안감은 극에 달한 상황이다. 19일 야간자율학습 도중 여진으로 귀가한 고3학생들은 “정말 이러다가 큰 지진이 오는 게 아닌지 불안해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포항여고 2학년생 2명은 여진이 닥치자 호흡곤란을 호소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포항시 북구 장성동 20층 아파트에 사는 최모씨는 여진이 계속 될 것을 우려해 고3 아들을 저층아파트에 사는 친척집에 보내기도 했다.
울산 중구에 사는 유모(56)씨는 “19일 밤‘쿵’하고 땅이 흔들리자마자 속옷 차림이던 고등학생 아들이 자기 방으로 가서 외출복을 차려 입고 나왔다”며 “‘혼자 살려고 그러냐’는 우스갯소리로 안심시켰지만 불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내진설계가 된 건물에 사는 주민들도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초고층 건물이 밀집한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 한 고층 건물에 사는 이모(58ㆍ여)씨는 20일 “지진으로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몇 집은 아이들과 대피한다고 난리였다”며 “아파트가 규모 7.1 지진에 버틸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돼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집이 흔들리니 공포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진에 대한 집단 패닉 현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더 큰 지진이 오지 않을까하는 공포감 때문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직장인 오진환(36)씨는 “일흔이 넘은 부모님이 경주에 사시는데 지진이 또 나면 도와줄 친척 하나 없어 하루하루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취업준비생 최미란(26ㆍ여)씨도 “자취방에 혼자 살고 있는데 일반 가정집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걱정했다.
지진에 대비해 자구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직장인 유정은(26ㆍ여)씨는 “국민안전처의 지진 대비 매뉴얼과 동영상을 여러 번 보고 친구들과 공유했다”며 “이 정도로 안심되지 않아 인터넷에서 일본 도쿄도가 제작한 320쪽짜리 한국어 지진대비 매뉴얼도 내려 받았다”고 말했다. 재난대비 용품을 사 모으거나 생존 배낭을 꾸리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경북 영천에 거주하는 정은지(24ㆍ여)씨는 “지난 12일 지진이 났을 때 집에서 몸이 붕 떴다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튿날 바로 손전등과 비상금, 물 등이 담긴 생존 배낭을 싸놨다”고 말했다.
실제 재난용품 판매점에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재난대비 물품 쇼핑몰을 운영하는 윤모(38)씨는 “주문한 뒤 배송 소요 시간을 묻는 전화가 하루에 수십통씩 걸려 온다”며 “3만원 정도 하는 ‘생존 세트’ 판매량이 지진 발생 이후 4배나 늘었다”고 전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지진이 나면 뚜껑이 덮이면서 자동으로 몸을 가둬주고 틈 사이에 물이나 식료품을 미리 저장해 둘 수 있는 ‘지진 침대’ 등 재난 용품 작동 영상도 인기를 끄는 중이다.
지진 불안감이 빠르게 퍼지는 이유는 다른 재난보다 생소하기 때문이다. 도시재난 생존 전문가인 우승엽씨는 “홍수, 태풍 같은 재난은 국민들이 수시로 겪지만 지진은 처음 맞닥뜨린 상황이라 정신적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며 “배경 지식도 적은 만큼 대처법 역시 막연해 집단 트라우마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지진 발생 요인을 놓고 각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점도 공포를 키우고 있다. 김재관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지진 관련 정보를 정확히 제공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국가기관뿐 아니라 전문가 사이에서도 분석이 엇갈려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승희 성균관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대다수 국민이 지진과 관련된 기초교육을 받지 못한데다 실생활에서도 대피 연습을 해본 적이 없어 심리적 안전망이 무너진 상태”라며 “일본이나 미국처럼 유치원 과정에서부터 지진교육을 생활화해 불안 분위기를 상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부산=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경주=김성웅기자 ks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