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기관들이 합심해 진실 묻으려 해 유족에게라도 사실 알려야겠다 결심
하 병장 무죄 입증은 내가 해야할 일 부모도 진실 규명의 필요성 납득
총기난사 임 병장 사건 수임도 우연, 진실 규명에 좌파 우파 따로 있겠나
엉뚱한 변호사다. 변호사라면 으레 의뢰인 입장에서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법. 그런데 이 변호사는 수사가 잘못됐다며 검찰을 몰아 세우고 오히려 자신이 지켜야 할 의뢰인을 더 중한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수(功守)가 뒤바뀐 형국이다. 김정민(44) 변호사. 그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육군 28사단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 가해자 중 한 명인 하모(22) 병장의 변호인이다.
김 변호사는 4월 윤 일병 사건이 불거진 직후부터 가해자들을 상해치사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가 군인권센터와 손잡고 집요하게 사건의 공론화를 시도한 결과 군 검찰은 최근 윤 일병 가해 병사 4명에 대한 공소장을 살인죄로 변경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야 제자리를 찾아갔는지 몰라도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이러고도 의뢰인이 변호를 계속 맡길까”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상식과 통념을 뒤집는 김 변호사를 만나보고 싶었다. 16일 서울 서초동 그의 사무실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뒤 “세상을 뜯어 고치려 작심한 좌파 변호사”란 오해는 상당 부분 풀렸다. 물론 돈키호테 스타일의 저돌적 인물이란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변호사법 제1조(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를 충실히 지키려는 ‘보통 변호사’일뿐이라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궁금한 점부터 묻겠다. 도저히 가해자 변호인 같다는 생각이 안 든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웃음). 변호사는 의뢰인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형량을 낮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 같은데, 윤 일병 사건처럼 공익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경우 실체 파악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라서 변호사가 상인으로서의 이해를 추구하기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너무 담론적이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하겠다. 하 병장 부모님에게도 살인죄로 기소될 수 있다고 알렸나.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주범인 이 병장의 의도적 폭행이 분명했고 부검감정서에 그런 부분이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진실 규명의 필요성을 설득했고, 다행히 하 병장 아버지가 불리함을 감수하겠다고 했다.”
-어쨌든 하 병장 처벌이 세질 수 있다고 고지한 셈인데, 가족들이 수용했다는 건가.
“사실 하 병장은 숨진 윤 일병과 굉장히 비슷한 캐릭터로 유약한 성격이다. 부모님은 하 병장이 6~7개월만 늦게 입대했으면 ‘이 병장에게 시달림을 당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이 병장의 행태에 대한 거부감이 큰 편이다. 심지어 하 병장이 살인으로 기소되는 상황이 벌어져도 아버지는 ‘변호사님의 변론 방향을 믿는다. 저희 아이 형량이 조금 늘어 나더라도 밀어 붙이라’고 했다. 의뢰인이 반대하는데 변호사가 설칠 수는 없지 않은가. 수임료도 다 받고 있다(웃음). 물론 특이한 케이스인 건 맞다.”
-그래도 변호사가 군 검찰 수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소를 어떻게 할지는 검찰의 권한 아닌가.
“누가 봐도 질식사가 아닌데 공소장에 그렇게 기재되는 게 옳은 일인지 반문하고 싶다. 물론 질식사로 가면 피고인들이 불리할 건 없다. 그러나 재판은 결국 진정한 화해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묻어두면 누가 잘못했는지 알 수 없고 진정한 화해도 이뤄질 수 없다. 윤 일병의 유족들에게는 반드시 잔인한 죽음에 대해 알려야 한다.”
-살인죄는 처음 사건을 수임했을 때부터 확신했나.
“상해치사로 처음 기소된 뒤 기록을 자세히 보고 군 검찰관한테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얘기했다. 주로 이 병장을 두고 한 말인데, 무엇보다 폭행의 정도가 심했다. 마지막에 윤 일병을 엎어 놓고 복부를 10회 이상 가격하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핥아 먹으라고 하는 등 잔혹 범죄임이 분명했다.”
-그러면 하 병장은 살인죄가 아니란 말인가. (김 변호사는 이 부분이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자신이 살인죄 기소를 언급한 대상은 이 병장 한 명뿐이라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 피고인(하 병장)이 살인죄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군 검찰이 살인죄를 선별하기 어려우면 4명 다 일괄 기소를 하되, 다만 무죄를 입증하는 건 변호인의 몫이라고 했다. 일련의 절차와 상황을 살펴봤을 때 이 병장을 제외한 가해 병사들은 살인이라고 볼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이젠 하 병장의 살인죄 무죄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가해 병사 변호인들과 갈등이 많을 것 같다.
“이 병장 변호는 선배가 맡고 있는데 정보 공유가 안 되는 건 맞다. 내가 검찰 노릇을 하고 있으니 ‘특검 짓 좀 그만 하라’는 얘기도 들리더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군 검찰이 제대로 했으면 내가 나설 이유도 없었으니까. 윤 일병 부검에 대한 증인 심문만 봐도 검찰과 부검의가 말을 짜맞추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나 다름없었다.”
-하 병장 변호는 어떻게 맡게 됐나.
“하 병장 부모님과 안면이 있는 사무실 동료 변호사 통해 의뢰가 들어 왔다. 내가 수임한 사건이 아니었다. 처음엔 서류 작성 등 실무적 도움을 달라고 해서 같이 했는데, 접견을 자주 가고 변론도 몇 차례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컨트롤을 하게 됐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지금처럼 크게 부각이 되지 않았는데.
“4월 일어난 사건이 언론에 노출된 건 재판이 끝날 즈음이었다. 담당 부검의를 몰아세웠는데도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다. 부검의한테 ‘(윤 일병이) 어떻게 맞아 죽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해서 내가 오줌 싸는 병사를 때리는 등 요지만 얘기하니까 유족들이 온 몸을 부르르 떠는 걸 봤다. 그 때 ‘아, 이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유족들에게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고인 변호인이 수사 기록을 보여줄 순 없어 고심 끝에 군인권센터를 접촉하게 됐다.”(이후에는 군인권센터가 중심이 되어 사건의 진상에 대한 폭로를 계속했다)
-6월 일어난 강원 고성 총기난사 사건 주범인 임모 병장에 대한 변호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평소 군 인권에 관심이 많은가.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임 병장 사건 역시 동료 변호사가 수임한 건이다. 우연히 군 사건을 연이어 맡게 되다 보니 외부에 군인권 변호사처럼 비치지만 전혀 아니다. 변호사 개업 2년 동안 수임한 사건 중 군 관련은 10%도 채 안 된다. 두 건을 맡은 이후 들어오는 군 사건도 없다.”
-군대가 특수조직이라 변호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군법무관으로 2001년부터 2012년까지 10여년 간 일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공부한 게 아까워 이것저것 고등고시에 지원했는데, 12전 1승 11패였다. 그 1승이 법무관 합격이었다. 그것도 2001년 군가산점제 위헌 결정이 나면서 지원 연령 연한을 늘려줘 가까스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천운이었다.”
-법무관 경험이 도움이 되긴 했겠다.
“경남 창녕에서 시작해서 경기 포천, 강원 원주 등을 거쳐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전역을 했으니 전국을 떠돈 셈이다. 군 검찰, 판사, 법무참모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지만 돌이켜 보면 파란만장한 삶의 연속이었다. 2004년 포천에서 법무참모로 일하면서 칼부림 사건을 무마한 헌병 수사관을 구속하고 자격을 박탈한 적이 있다. 이 때 헌병과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고, 소령 진급도 누락됐다(웃음).”
-군 부조리가 심한 편인가.
“2008년 군법무관 파면 사태가 터졌다. 국방부가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 몇몇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데 대해 법무관들이 헌법소원을 내자 파면 조치를 한 것이다. 당시 내부 통신망에 ‘적반하장격이다. 도둑놈이 주인을 때려잡겠다는 꼴’이라는 과격한 글을 게재했다가 육군본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칭한 게 아니냐는 이유였다. 합리적 문제제기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많다.”
-그게 군을 나온 계기가 됐나.
“법무관 파면 사태 이후 반년 동안 먹기만 하면 체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는데 2010년 천안함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사단 내 설치된 분향소에 조문을 하러 가지 않았더니 한 간부가 ‘기무가 보고 있다’며 겁을 주더라. 나는 희생 장병들에 대한 조문 만이 바람직한 위로의 방법인지 고민 중이었는데. 윽박지르고 절대 충성만 강요하는 분위기여서 나 같은 사람은 더 이상 군에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상명하복식 군 문화가 윤 일병 사건을 촉발했다고 보는가.
“윤 일병 사건의 본질은 살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왜 사인이 둔갑됐는지가 핵심이다. 잔혹 범죄를 교정하라고 있는 군 기관들이 합심해 진실을 묻은 거다. 이른 바 ‘손을 탄’ 사건이다. 군 사법시스템이 붕괴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군이 내놓은 여러 개혁 방안들이 무용지물이란 말인가.
“구조적 문제가 병폐다. 바깥에서는 꽤 비중있는 권력자나 돼야 검사에게 외압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군은 검찰관이 사단에 소속돼 있어 독립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윤 일병 사건에서 사인이 엉뚱하게 나온 것을 과오가 아닌 의도적 왜곡으로 보는 이유다. 국방부가 군사법체계를 손질한다고 하지만 군사법권 독립을 위한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 장교 하나 입건하려 해도 윗선의 눈치를 엄청나게 봐야 하는데 재판절차 몇 군데 바꾼다고 개혁이 되겠는가. 독립되지 않은 사법권은 결정적 순간에 왜곡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진보적 변호사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그 점이 가장 억울하다.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정 마인드를 존경하는 사람이다. 옆 방 변호사도 ‘형은 아무리 봐도 우파인데’라며 갸우뚱 하더라. 이번 건으로 아는 군 간부와 통화하니 ‘(같은 법무관 출신인데) 왜 이리 괴롭히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 규명에 좌파와 우파가 어디 있겠는가. 실체를 까발려야 의혹이 남지 않는다. 윤 일병의 죽음은 상당 부분 제자리를 찾았지만 뿌리는 남아 있다. 누가 잘못해서 사인이 왜곡됐는지 밝혀야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는다.”
마침 인터뷰 당일은 살인죄로 공소장이 변경된 이후 재개된 윤 일병 사건 관련 피고인들의 공판이 처음 열린 날이었다. 그러나 군 검찰은 이번에도 사인을 질식사에서 쇼크사로 바꾼 이유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고 김 변호사는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저녁 무렵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수사기록 목록에 들어 있는 부검감정서의 페이지가 달라 검토가 필요하다”며 두 평 남짓한 사무실 스탠드의 불을 다시 밝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을 죽이고 관속에 돌을 넣어 바다에 빠뜨리러 가는데 중간에 엎어지게” 하는 작업이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김민정기자 fact@hk.co.kr
●김정민 변호사는
김정민 변호사는 197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법조인을 꿈꿨다. 그래서 대학도 법대(경희대 법학과)를 나왔지만,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껴 대학원(서울대 법과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다 “뻥 뚫린 길인 줄 알았던 교직이 천길 낭떠러지”라는 깨달음을 얻고 늦은 나이(27세)에 다시 고시로 방향을 틀었다. 사법ㆍ입법ㆍ행정고시 등 외무고시를 제외한 각종 고등고시에 11차례나 도전했으나 번번이 2차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2차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다고 한다.
2001년 군법무관 합격은 열두 번째 도전 끝에 얻은 성과였다. 군인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막연하게 장교를 동경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준 고마운 직업이었다. 법무관이 천직인 줄 알고 10여 년을 전국을 누비다가 돌연 경직된 군대 문화에 싫증이 나 2012년 법무관 출신 동료 6명과 법률사무소를 차려 대표변호사를 맡았다. 그는 “껌도 팔고 담배도 파는 구멍가게”라고 했다. 군 사건만 다루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법무법인 이름인 ‘열린 사람들’도 경상도 출신 동료가 무심코 정했을 뿐, 진보적 지향과는 절대 무관하다고 여러 차례 그는 강조했다.
김이삭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